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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시력 100억 배인 허블망원경 반사경의 재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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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32면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의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피천득 선생의 ‘오월’ 중에서 신록에 관한 표현이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미래의 녹색 보석 ‘베릴륨’

선생의 말처럼 오월은 ‘비취가락지’다. 동양에서 오월의 보석은 비취다. 보통 옥이라고 부르는 비취는 녹색 빛이 아름다운 보석이다. 옛날 우리 양반 댁 아낙들이 머리에 꽂았던 옥비녀와, 사랑의 징표로 삼았던 옥가락지도 이것이다.

서양에서는 오월의 탄생석이 에메랄드다. 투명한 녹색이 아름답다. 비취나 에메랄드나 모두 행복을 의미한다. 에메랄드는 여러 가지 얘깃거리가 많다. 성질이 괴팍한 로마의 네로 황제는 검투사들의 결투 장면을 에메랄드 유리를 통해 보는 것을 즐겼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사람이 살지 않는 누비아 사막에 에메랄드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 잉카와 아즈텍 문명은 에메랄드를 성스러운 보석으로 숭배했다. 힌두교의 경전 베다에는 “에메랄드는 행운과 안녕을 가져온다”고 했다. 인도의 황제와 왕비들은 에메랄드를 좋아했다.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에는 인도의 ‘제항기르 마할’ 황제가 소유했던 에메랄드 컵이 전시돼 있다. 에메랄드는 콜롬비아산이 가장 아름답다. 그중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후커 에메랄드 브로치(사진)가 유명하다. 티파니에서 디자인한 것인데, 에메랄드 75.47캐럿과 다이아몬드 13캐럿으로 만들었다.

보석 무게의 단위는 캐럿(cr)이다. 지중해 연안에서 나는 캐롭(구주콩)나무 열매에서 비롯됐다. 이 콩 한 알의 무게는 0.2g이다. 금의 순도를 나타내는 단위도 캐럿(K)인데, 100%의 순금이 24K(캐럿)이고, 18K는 18/24, 14K는 14/24 만큼 금이 포함돼 있다.

에메랄드의 주성분은 베릴륨이다. 베릴륨은 녹주석에 14% 이상 포함돼 있다. 베릴륨은 마법의 금속이다. 베릴륨으로 만든 합금은 매우 단단하고 강철보다 튼튼하다. 열에 강하면서 열과 전기도 잘 통한다. 그래서 비행기에 이 합금으로 만든 부품이 1000개 이상 들어간다.

우주선이 지구로 귀환하면서 대기권에 진입할 때 열을 많이 받는 게 문제다. 베릴륨은 열에 잘 견딘다. 그래서 존 글렌이 1962년 2월 타고 갔던 제미니 우주선은 귀환선 바닥을 베릴륨으로 만들었다.
베릴륨과 구리의 합금으로 스프링을 만들면 2000만 번 진동을 줘도 탄성이 유지된다. 오메가나 롤렉스 같은 명품 시계에 들어가는 스프링과 톱니바퀴도 이 합금으로 만든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시계는 많이 만들지만 고가시계는 생산하지 못한다. 베릴륨 합금으로 된 정밀부품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독일이 무기 제조에 쓰일 베릴륨이 모자라 문제가 생겼다. 베릴륨 합금의 생산은 미국이 1위다. 독일은 전쟁 중이라 미국에 주문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중립국인 스위스를 이용했다. 스위스 시계 제조업체의 명의로 미국에 베릴륨 청동을 주문했다. 향후 500년 동안 전 세계의 시계 스프링에 쓸 수 있는 물량이었다. 결국 음모가 탄로나 수입을 못 했다. 그럼에도 독일군의 비행기용 연발 기관총에서는 베릴륨 청동으로 된 스프링이 가끔씩 쓰였다고 한다.

베릴륨은 특이하다. 보통 금속이 돌 등에 부딪히면 불꽃이 튄다. 그래서 광산이나 화약 공장, 기름 창고 같은 데서 화재나 폭발 사고가 잦다. 그러나 베릴륨 합금은 부딪혀도 불꽃이 생기지 않는다. 또 있다. 공기 중 소리의 속도는 초당 340m, 수중에선 145m다. 그러나 베릴륨 속에선 1만3000m다. 그래서 야마하 같은 고급 오디오의 스피커에 사용된다.

베릴륨은 핵물리학에서도 중요하다. 베릴륨에 α입자를 충돌시키면 중성자가 방출된다. 제임스 채드윅은 이 실험을 반복해 중성자를 발견한 공로로 193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중성자는 전기를 띠지 않아 다른 원소의 핵에 쉽게 파고 든다. 그래서 베릴륨은 중성자의 속도를 조절해 핵반응이 효과적으로 일어나도록 하는 데에 쓰인다.

지금까지 주로 우주의 천체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은 허블망원경이다. 이 망원경의 시력은 인간의 약 100억 배다. 허블 다음 세대를 이어갈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은 허블 시력의 3.4배다. 인간의 300억 배다! 바로 이 새 망원경의 반사거울에도 금속 중 가장 반사율이 뛰어나고 가벼운 베릴륨이 사용된다.

이렇게 베릴륨은 미래의 금속이다. ‘가볍고, 단단하고, 탄성 좋고, 보석같이 영원한 합금’ 베릴륨. 이제 에메랄드에서 베릴륨으로 눈길을 돌려 보자. 새로운 녹색 미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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