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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내 아이’ 아닌 ‘우리의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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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1923년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方定煥)은 같은 해 3월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그가 이 잡지에서 회고한 자신의 유년시절은 가난과 노동의 기억뿐이었다. 그는 어릴 적 한 달에 7~8번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친지의 집에 가서 식량을 얻어오곤 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남에게 구걸을 하는 수치심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다음에 너는 이런 꼴 아니 하는 사람이 되어라”고 말하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거역하지 못해 쌀 동냥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 살 먹은 자신과 여덟 살짜리 사촌동생은 학교만 다녀오면 우물에 가서 하루에 10여 차례씩 물을 길어 날라야 했다고 한다. 이런 배고프고 굴욕적인 고된 일상이 어린이날 5주년을 맞은 그가 떠올린 ‘나의 어렸을 때’였다.(‘어린이’ 1928년 5, 6월 합본호)

 이것은 방정환이 서른셋에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어린이가 나라의 미래’라며 소년운동에 투신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즉, 그는 다른 어린이들이 자신처럼 가난과 노동에 시달려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내는 일이 없기를 바랐던 것이다.

 방정환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방정환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했으며 당시 소년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다진 인물은 김기전(金起田)이었다. 1923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에 조선소년운동협회가 배포한 선전지는 김기전의 ‘개벽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개벽’ 1923년 5월)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글에서 김기전은 어른들이 가부장적 유교질서에 젖어 어린이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것, 그리고 무산(無産) 가정에서 “즐겁게 놀아야 하고 힘써 배워야 할 어린이들이 불행하게도 노동하여야 하고” “학교가 문 옆에 있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당시 소년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가정·학교·사회에서 항상 어린이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 시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어린이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그들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해 영양불량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유소년의 노동을 금지하고 모두에게 취학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은 한국의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한때는 시행이 중단되기도 했고, 날짜도 몇 차례 바뀌어왔다. 하지만 그 정신과 취지만은 처음 어린이날을 만들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 좋겠다. 오늘이 ‘내 아이’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는 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림·무관심·폭력·학대·노동 착취 등에 방치되어 있는 ‘우리 아이들’을 돌아보는 날이 되길 바란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