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분당 만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문창극
대기자

이번 선거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국민이 정당을 이긴 선거였다. 선거 때마다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준 분당을 보자. ‘분당 우파’ 어쩌고 하면서 한나라당은 분당 주민들을 당연히 자기들 사람인 것처럼 치부했다. 그러나 분당 주민은 그들의 집토끼가 아니었다. 강원도를 보자. 접경지대 운운하면서 그 보수성향으로 인해 한나라당은 공천만 주면 다 끝나는 줄 생각했다. 쇠고기 파동에 그렇게 혼이 나고도 그에 앞장섰던 방송사 사장을 단지 인지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내보냈다가 망신당했다. 김해를 보자. 야당도 국민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은 노무현의 이름만 내세워도 거저 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김해 주민은 그들이 바라던 식으로 어리석지 않았다. 이런 결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국민은 어느 당 편도 아니었다. 그들 주머니 안에서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조약돌이 아니었다. 국민은 국민 편이었다.

 정치란 백성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리를 들으려면 고막이 떨려야 한다. 그 판막이 예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당들은 어느 사이엔가 그 떨림을 듣지 못하고 있다. 국민이 살고 있는 현실과는 점점 멀리 떨어져 갔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여나 야나 모두 이념에 빠져버린 탓이다. 이념 정치는 현실에는 관심이 없고 이념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분당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이 현상은 그대로 나타났다. 천당 아래 동네 사람들도 모두 삶에 지쳐가고 있었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못해 부모 눈치를 보며 집에 박혀 있는 아들딸들, 어느 정도의 소득이 있어도 자녀들 사교육비 때문에 허덕이는 젊은 부부들, 늘어난 수명에 저축한 돈이 떨어져가는 노인들, 그들은 각자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답답한 현실에 대한 답이 나오기를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최소한 떨리는 마음으로 그런 현실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정치인이 나와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껏 내세운 것이 “좌파에게 권력을 내줄 수 없다” “대한민국을 흔드는 세력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분당이 왜 과거에는 한나라당 후보에게 70%의 지지를 몰아주었던가? 그들은 노무현, 김대중의 이념 정치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념만으로는 복잡한 현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좌파뿐 아니라 우파 정당까지도 이념몰이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팔고 북한을 때리기만 하면 분당 사람들은 다 찍게 돼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나라당이 그들 말대로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면 그 안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나라는 부의 집중이 더 깊어지고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정권은 ‘공정 사회’를 내세웠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를 보고 공정한 사회라고 인정해 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금융계는 누가 잡고 있고, 수백 개의 공기업은 누가 차지하고 있나. 스스로는 공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보고 공정하라면 설득력이 있겠는가. 이 정권의 해결 방법은 재벌 때리기다. 초과이익 공유제를 외치고, 연기금 주주권으로 협박도 해 본다. 5000년 역사에서 우리 상품이 세계 1, 2위를 했던 시절이 있었는가? 그런 회사들을 잘 가꾸어 가면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늘리고, 중소기업들도 같이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이런 현실은 외면하고 키워드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이념적인 접근인 것이다.

 선거 결과를 보고도 정치인들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정파적 차원에서만 이번 사태를 해석할 뿐이다. 책임지고 물러날 사람은 누구고, 누가 나서야 한다는 얘기뿐이다. 자리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 선거를 걱정한다. 왜? 국민이 걱정되어서? 아니다. 그들 자리가 없어지는 게 걱정인 것이다. 야당은 또 어떤가. 이번에 통합의 힘이 컸으니 다음 선거 때도 야당이 통합해야 한다는 말뿐이다. 그들끼리의 이합집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 마음속의 국민은 오로지 표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번 선거에서 살아있는 국민을 보았다. 우리 정치는 이제 물줄기가 바뀌었다. 한때는 지역감정이, 그 다음은 이념 문제가 한국 정치의 지형을 형성했으나 이제는 우리 정치가 현실로 돌아왔다. 국민 각자가 “누가 우리의 현실 문제를 위해 나서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정당에 볼모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편에 서는 것이다. 소위 자유로운 중간층이 늘어나고 있다. 국민이 정치를 결정하는 시대, 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인 시대가 확실하게 다가온 것이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우리를 실망시켜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우리는 누구가 되었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당의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분당 만세!!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