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냄새를 가미한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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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터치.’ 왠지 요즘 세상에 잘 어울리는 말처럼 들린다. 미래학자 존 네이스비트는 최근 저서의 제목으로 ‘하이 테크, 하이 터치’를 골랐다. 책의 부제는 ‘기술과 삶의 의미를 찾아서’다. 결국 하이 테크가 첨단기술을 상징한다면 하이 터치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인간적인 손길을 뜻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올해 나이 70세에 접어든 존 네이스비트는 앨빈 토플러와 더불어 대표적인 미래학자로 꼽힌다. 자신은 ‘글로벌리스트’를 고집하지만.

우리는 ‘메가트렌드’의 저자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전세계 18개 국어로 번역돼 모두 8백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의 저자가 21세기 벽두에 ‘하이 터치’를 거론한 까닭은 무엇일까.
네이스비트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이미 기술에 찌들었으며 인간이 기술에 지배당하는 꼴을 면하기 위해 인간의 냄새가 가미된 균형된 삶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네이스비트의 21세기 강령인 셈이다.

기술과 인간성의 조화, 물질적 풍요에 걸맞은 정신적 여유를 추구할 필요가 절실해졌다는 그의 호소는 자못 절박하다.

신간 소개를 위해 전국을 순회 중이던 네이스비트는 성탄절을 맞아 찰스 江이 내려다 보이는 케임브리지의 아파트에 잠시 들렀다. 성탄절날 아침에 그를 전화로 만났다. 네이스비트는 21세기에 크게 달라질 현상으로 유전공학의 가공할 발달을 든다. “인간이 유전자 코드에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은 갈릴레오·다윈의 발견에 버금가는 일이다. 치매나 파킨스씨병 등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인간복제가 수반할 문제점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본능처럼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기술개발이 인간생활에 미칠 파장을 우선 인정하라는 주문이다. 다만 “인간이 기술을 지배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해선 인간성의 터치를 생활 속에 가미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서구사회가 동양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며 지난 4년간 미국에서 발간된 서적 가운데 8백여 종이 동양의 정신세계를 주제로 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또 미국사회내 불교신도가 급증하는 현상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네이스비트는 딸 나나, 그녀의 친구 더글러스 필립스와 함께 책을 공동집필했다. 시카고에서 살던 두 사람은 네이스비트가 머무는 콜로라도州의 텔룰라이드로 아예 이주했다.

네이스비트는 딸과 함께 책을 쓰는 작업 그 자체가 ‘하이 터치’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고 자랑했다. 세대간의 차이를 확인하고 또 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들은 생각이 멈출 때면 산속으로 캠핑을 떠났다. 깊은 밤 쏟아지는 별을 보며 대화를 나눴고 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인간성 회복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했다.

네이스비트는 ‘하이 테크‘와 ‘하이 터치’를 적절히 배합해 사업에 성공한 사례도 적지 않다며 우선 마사 스튜어트를 꼽았다.

그녀는 요리·집안가꾸기에서부터 패션·생활용품까지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관여되는 거의 모든 일에 손댄 미국 여성의 표상(아이콘)
이랄 수 있는 인물이다. 네이스비트는 “스튜어트는 기술의 지배에서 벗어나 기술을 적절히 활용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여성”이라면서 “그녀는 아마 미국내에서 최첨단의 기술로 무장된 여성일 것이다.개인 팩스기만 여섯 대, 14개의 전화선, 자동차안에도 일곱 개의 이동전화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자신이 보내는 메시지는 ‘인간의 손길이 직접 가미된 음식과 생활장식이 줄 수 있는 매력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하이 터치를 하이 테크를 통해 전파하는 대표적 성공사례인 셈”이라고 밝혔다.

네이스비트는 다른 예로 미국내 대형서점인 ‘반스 앤드 노블’社를 들었다. “서점 한 구석에 편안한 소파를 갖춰놓고 아늑한 집안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음료와 간단한 음식도 서비스하는 독서환경을 꾸며내 호응을 얻고 있다.”

인간이 기술에 지배되는 경우를 면하기 위해 네이스비트는 인성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머릿속에 지식을 구겨넣는 교육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를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국경이 희미해지는 세상, 인터넷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격차를 좁혀나갈 미래에 인간은 스스로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성이 가미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교육이 중요해진다는 얘기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반작용이랄까 21세기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국가는 소속원들의 문화적 정체성 확인의 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마저 있다고 말한다.

생명공학·인터넷·인간복제·우주개척 등 미래를 향한 수없는 화두들이 입에 오르내리는 신년벽두. 인간의 장래를 걱정하며 인간성이 넘치는 미래를 갈망하는 네이스비트가 고심끝에 내뱉은 화두는 ‘하이 터치’다.

길정우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정치학 박사·for N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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