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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실과 ‘생각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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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우리 역사가 제자리를 찾아오고 있다. 내년부터 고등학생들은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공부하게 된다. 각급 공무원 시험과 국공립 교사 임용시험에도 한국사가 도입된다고 한다. 매우 반가운 일이다.

 2002년 한국사 교과서 검정 과정의 이념 논쟁은 역사 교실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과거의 교과서가 가르쳤던 우익 사관, 보수 사관의 편협성을 지적한 소위 좌익 사관이 정사(正史)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대한 보수적 역사학자와 교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무엇’을 포함시키고 ‘무엇’을 제외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한국 근현대사만큼이나 심란했던 것이 바로 그 내용을 담는 교과서 논쟁이었다. 역사 교육의 내용을 둘러싼 문화 정치적 논쟁임과 동시에 현실 정치의 게임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교실에서 한국사의 위상은 재미없고 지루한 변두리 교과목으로 추락했다. 바로 그 문제의 한국사가 교실로 돌아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돌아온 한국사를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질문과 대면해야 한다. 역사 교실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생각의 힘’이다. 다른 말로 ‘역사적 상상력’이라고 해도 좋다. 모든 역사 교과서는 과거에 어떤 공간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다룬다. 교과서의 활자에서 시작되는 시간과 공간의 여행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생각의 힘이다.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과서를 읽는 학생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아니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하다. 교실에서 서로 다른 생각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존중돼야 한다. 특정 역사관이 학생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어느 한 방향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역사는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들은 역사의 사실들을 현재의 우리의 모습과 부단히 연결하는 또 다른 생각의 훈련을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재조명이 역사 교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최근 우리 사회의 논쟁은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일이다. 유럽의 중세 십자군 전쟁은 종교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세속적 영토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이슬람 채권법을 둘러싼 최근 우리 사회의 종교 논쟁이 낯선 외국 종교였던 불교와 그 문화를 수입한 고구려 소수림왕의 고민과 연관되어 해석될 수도 있다. 조선 초기 불교와 유교의 갈등에 대한 공부는 다문화·다종교 사회인 우리 사회의 현실 조명에 도움이 된다.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시기에 서구 문명과 함께 유입된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현재 우리 사회의 종교와 정치 문제 논의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이렇게 보면 역사 공부는 분명히 현실에 대한 공부다. 현실에 대한 재미있는 ‘생각’ 공부다.

 생각의 힘은 역사 교실의 동력임과 동시에 역사 공부의 결과로 기대되는 중요한 성과물이다. 우리 중·고등학생들의 인지 근육이 ‘생각 근육’이 아닌 ‘암기 근육’ 중심으로 기형적으로 발달되고 있음이 애처롭다. 매우 높은 난이도의 대학입학 논술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신입생들의 생각 근육도 생각보다 훨씬 빈약하다. 논증 실력조차 사교육을 통해 암기와 요령으로 쌓아 왔으니 이들에게서 고단백질로 꽉 찬 생각 근육을 기대할 수 없어 안타깝다.

 생각의 힘은 이야기 능력의 원천이다.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읽고,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소화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과 글에 담아내는 능력이 건전한 미래 시민사회 구성원의 중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와 선생님은 역사를 보는 관점을 이야기해 주되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사 교육의 목표를 투철한 민족관과 국가관의 확립으로 미리 한정하는 것도 위험하다. 특정 도그마가 역사 교실을 활용했을 때 나온 비극의 사례는 세계사 속에 얼마든지 등장한다. 학생들 스스로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세워 나가도록 시간을 주고 기다려야 한다. 교실과 사회의 포용력은 생각의 힘을 극대화한다.

 생각의 힘은 생각 근육에서 나온다. 근육은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한국사 교실이 ‘무엇’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닫힌 공간이 돼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하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 생각 근육을 키우는 운동장이 되어야 한다.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