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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4) 마오안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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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19년 만에 상봉한 마오쩌둥 부자의 모습. 이날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마오안잉은 두 명의 소련인 의사와 함께 옌안(延安)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고 있던 마오쩌둥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김명호 제공]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폐광지역인 평안북도 대유동 골짜기에 항미원조 지원군(중공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금광 사무실이었던 목조 건물에 지휘부를 차렸다. 한때 금맥을 찾아 헤매던 흔적들이 주변에 허다했다. 방공시설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11월 7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제1차 작전으로 우리 국군과 미군은 청천강 이남까지 후퇴했다.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전까지 한국전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며 총공격을 준비했다.

11월 24일 오후, 미군 비행기 두 대가 대유동 상공을 한 시간 남짓 휘젓고 돌아갔다. 동체에 ‘BLACK WIDOW(미국산 독거미)’라고 써 있는 정찰기였다. 징조가 심상치 않았다.

그날 밤, 한반도 북단의 폐광에서 중공군 당 위원회 긴급회의가 열렸다. 부사령관 홍쉐즈(洪學智·홍학지)가 펑더화이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의결했다. 이튿날 새벽, 홍쉐즈는 펑더화이에게 산중턱에 있는 동굴로 집무실을 이전하자고 건의했다.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이 폭사하기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펑더화이의 수행부관이었던 양펑안(楊鳳安·양봉안)에 의하면 펑더화이는 호통을 치며 당 위원회의 결정을 거부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판단한 홍쉐즈는 펑더화이가 화를 내건 말건 죽을 힘을 다해 멱살을 잡고 문 쪽으로 나갔다. 넋을 잃고 있는 경호원을 향해 사령관의 침구와 붓, 벼루, 전보용지를 들고 따라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부사령관 덩화(鄧華·등화)가 동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펑더화이가 양펑안에게 상황실에 가서 전선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B-26 전폭기 두 대가 지휘부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상황실에는 참모 네 명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입구에, 아침밥을 거른 마오안잉과 서북 출신의 참모 한 사람은 안쪽에 있는 난로를 쬐며 볶음밥을 데우고 있었다. 보고할 문건을 챙겨 든 양펑안이 문을 여는 순간 방금 전에 봤던 전폭기가 회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펑안은 빨리 피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수십 발의 폭탄이 비오 듯했다. 하늘과 땅이 불바다로 변했다. 국공전쟁을 치르면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무서운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펑더화이의 집무실도 불구덩이에 휩싸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네이팜탄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황실 입구에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안쪽에 있던 마오안잉과 참모 한 사람은 화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지 34일 만이었다.

보고를 받은 펑더화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직접 확인하겠다며 동굴을 뛰쳐나갔다. 현장은 참혹했다. 시신의 식별과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러시아제 시계와 애들 장난감처럼 예쁘게 생긴 호신용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되자 펑더화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4년 전 소련을 떠날 때 스탈린에게 받은 선물이라며 자랑하던 마오안잉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참으로 기구한 삶이었다.

마오안잉은 1922년 10월 24일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오쩌둥, 엄마는 일본과 영국에서 교육학·철학을 전공한 베이징대학 윤리학 교수의 딸이었다. 다섯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우한(武漢)으로 떠난 아버지는 폭동을 주도하고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갔다. 여덟 살 때 모친이 체포되는 바람에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감옥생활을 했다. 생모가 총살당하자 보석으로 풀려난 마오안잉은 동생들을 데리고 거리를 방황했다. 공산당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거쳐 소련으로 떠나기까지 5년간 상하이 거리를 헤매며 구걸과 호떡집 종업원, 인력거꾼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사이 막내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일설에는 실종), 바로 밑의 동생은 경찰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불치의 병을 얻었다.

마오안잉이 귀국하는 날 마오쩌둥은 병중이었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행장에 나가 아들을 맞이했다. 19년 만의 부자 상봉이었다. 이틀간 같은 방에서 10끼를 함께 먹으며 즐거워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도 회복했다.

저우언라이와 리커눙(李克農·사회부장 겸 외교부 부부장, 정보 총책이었다)으로부터 장남의 사망 사실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일 경호원 중 한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주석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그 처연한 옆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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