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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중독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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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신승철
큰사랑 노인전문병원장

수년 전 의사 S씨는 동기동창생이던 친구의 간청을 받은 적이 있다.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니 자신이 그간 운영해오던 지방의 어느 병원을 대신 좀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혹여 운영상 잘못되면 자신이 보증을 할 테니 염려 말라는 당부도 받았다. S씨는 오랜 친구라는 믿음이 더 커, 어렵지 않게 계약을 치렀다. 하나 지방에 내려간 지 두 달이 채 안 돼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 친구가 그전에 진 병원 관련 채무로 인해 더 이상 운영이 불가능해진 상태가 된 것이다. 서울에 있던 그 친구는 제 병원을 타인 명의로 개설해놔 재산의 가압류도 어렵게 됐다. 뒤돌아보니 그 친구의 고의성이 의심됐다. 희생양을 찾았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후 S씨는 무려 4년 넘게 재판에 시달리며 마음고생 꽤나 했단다.

 서울의 한 보건소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물어봤다. ‘이런 유의 사건들이 최근 10년 새에 부쩍 늘어났다’는 귀띔이다. 동업하다 잘되면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일. 공동 투자했다가 잘 안 되면 네 탓으로 몰아세우며, 법적 분쟁으로까지 가기 일쑤다. 의료계 내 선후배 개념도 갈수록 흐릿해져 간다. 편협한 시각에 고소, 고발도 남발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의료계 내 일부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닐 테다. 화이트칼라층에서의 ‘그림자 같은 범죄’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세상이다. 그런 범죄의 배경으로 이윤 추구 극대화에 눈 먼 자유시장 또는 탐욕적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그 원인(遠因)으로 삼기도 한다. 어찌 됐든 게걸스러운 탐욕의지가 근본 문제다. 도덕 붕괴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그 탐욕의지에는 좌우도 없는 것 같다. 모든 계층에 전염병처럼 번져 있다. 육체만이 생명의 주된 실상인 양 생각하는 의식 구조가 큰 탓이다. 그는 목전 이익밖에 모르고, 타인은 이용 대상이다. 권력 집착에도 안달이다. 인맥 자랑이나 무슨 ‘배경’이 있다는 소리도 자주 들먹인다. 자신의 위치성을 과대평가하기 좋아해서다. 이해관계가 우선이기에 선후배는 안중에 없고, 의리는 고사하고 기본 예의마저 무시된다. ‘법대로’를 자신한다. 명예, 돈, 권력에 행복의 의미를 부여한다. 사회적 인정 욕구에도 목이 마르고 성공 강박도 심하다. 열등감 때문인지 어떤 오류를 지적받아도 오히려 역으로 제 신념을 강화하는 쪽으로 몬다. 합리화와 억지 주장이 드세다. 미숙함이 교활한 삶으로 흔히 대체되곤 한다. 탐욕은 사실 결핍의 환상이다. 지나친 탐욕은 에고(자아)의 중독 현상이기도 하다. 엘리트층에서의 이런 ‘무식한’ 자기애가 증폭될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병들어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시각, 곧 냉정한 논리나 완고한 이념, 힘, 명예, 돈, 자존심에 대한 집착 추구는 D 호킨스 박사의 말대로 분명 ‘루시퍼’적 사고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잘못되어 가는 사회를 질타하는 ‘어른’들이 많아져야겠다. 새삼 여러 유형의 시민 감시 체제(civil watch)도 요구된다. 사회적 건강, 공평, 정의, 도덕이란 말이 체화된 세상을 모두가 바라서다. 자기와 남을 끝없이 속이는 의식의 문제는 결국 자각(自覺)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신승철 큰사랑 노인전문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