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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진보·좌파의 두 가지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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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서해에서 건졌다는 북한 어뢰 잔해에서 동해에만 사는 붉은 멍게가 발견됐다’는 주장은 결국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의혹은 가라앉겠지만 사건은 단순한 오보 소동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 해프닝은 한국사회 진보·좌파의 두 가지 심각한 위기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논리력이요 다른 하나는 책임성이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논리력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처음 ‘붉은 멍게’를 거론한 이는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다. 서프라이즈는 널리 알려진 진보·좌파 인터넷 매체다. 신씨는 제1 야당 민주당이 추천한 천안함 사건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천안함 조사에 있어 반(反)이명박 진영의 대표선수였던 셈이다. 신씨의 주장을 받아 의혹을 제기한 오마이뉴스는 진보·좌파 인터넷 언론의 대표주자다. 신씨와 오마이뉴스는 진보·좌파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인 것이다.

 ‘붉은 멍게’ 주장이 엉터리라는 건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알 수 있다. 붉은 멍게가 어뢰추진체에 붙은 물체보다 수십 배 크다는 기초적인 과학은 일단 제쳐두자. ‘붉은 멍게’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뢰 잔해는 동해에서 건져 올린 게 된다. 어뢰 잔해의 부식(腐蝕) 정도는 천안함 잔해와 같은 걸로 나왔다. 두 개가 동시에 바다 밑에 가라앉은 것이다. 그렇다면 천안함이 침몰될 때 북한 잠수함은 엉뚱한 동해에서 어뢰를 쐈다는 말인가.

 음모론을 좋아하는 진보·좌파는 이렇게 주장할지 모른다. 아니 ‘붉은 멍게’ 이론을 떠받치려면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과거에 북한이 동해에서 쏘았던 어뢰의 잔해를 한국 해군이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북한이 공격했다는 증거가 필요하자 몰래 백령도 바다 밑에 던져 놓았다. 부식 상태는 사전에 기술적으로 맞춰놓았다. 쌍끌이 어선을 그 바다로 유도해 어뢰 잔해를 건져 올리게 했다. 그러고는 천안함을 쏜 어뢰라고 발표했다’.

 도대체 이게 가능할까. 이런 조작을 하려면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은 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여야 할 것인가. 과거 어뢰 잔해가 발견된 걸 알고 있는 군관계자들, 그동안 그 잔해를 보관해온 장병들, 그 잔해를 넘겨받아 사건 조작에 활용한 현재의 군관계자들…이들 수백 명이 입을 맞춰야 이런 음모가 가능할 것이다. 그럴 확률은 진보·좌파가 좋아하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확률보다 낮다.

 논리력의 잣대로 보면 ‘붉은 멍게’ 파동은 진보·좌파의 4대 미망(迷妄)적 발언에 들어간다. 다른 세 가지는 “정부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지켜봤지만 0.0001%도 납득할 수 없다. 이건 사기다”(도올 김용옥), “천안함 외부 폭발은 소설”(유시민 당시 국민참여당 경기지사 후보), 그리고 “배추값 폭등은 4대 강 사업 때문”(손학규 민주당 대표)이다.

 책임성이란 측면에서도 진보·좌파는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다. 진보·좌파 진영(陣營)에는 성숙한 논리력과 이성적 사고를 가진 원로급이 있다. 신상철씨나 오마이뉴스의 방황은 진영 전체의 품위와 도덕성을 해친 것이다. 그런데도 주류 원로급은 침묵한다. 원로나 중진들은 비(非)이성과 선동을 왜 준열히 꾸짖지 아니하는가.

 노엄 촘스키는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좌파 지식인으로 56년째 MIT 대학 언어학 교수·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베트남·이라크전을 비롯한 미국의 대외 개입 전쟁과 시장 만능주의적 경제정책을 매섭게 비판한다. 옳든 그르든 그가 비판하면 미국사회는 일단 들어본다. 2005년 영국의 학술지인 ‘프로스펙트’는 촘스키를 ‘현세의 최고 지성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촘스키의 생명은 논리력과 객관적인 문제의식이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비난한다. 그에게 북한 같은 폭압정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의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붉은 멍게’ 지식인들은 한 줌의 얘깃거리도 안 될 것이다. 주장은 달라도 촘스키 같은 논리력을 보고 싶다. ‘명품 진보’는 어디에 있는가.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