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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전 의원 인간 金大中 이야기<7>] DJ, 김일성 사망 뒤 “그를 만났다면 역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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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고전인 삼국지는 결국 조조와 유비의 이야기다. 두 영웅이 만나고 헤어지고, 속고 속이고, 친구가 됐다 원수가 됐다 하는 이야기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과 맞설 야당후보를 뽑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DJ가 김영삼(YS) 후보에게 역전승한 이후부터 대한민국 야당사는 두 사람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DJ가 서거한 뒤 2009년 11월 26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과거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한자리에 모였다. YS가 두 계파를 함께 초청해 화합하고 위로하는 자리였다. 다들 옛이야기를 나누며 흥겹고 흔쾌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DJ와 YS 두 분은 살아생전 화해하지 못했다. DJ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YS가 병문안을 와 화해 의사를 비쳤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DJ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고인이 됐다. 먼 훗날 다른 세상에서 만나면 두 분이 곡절 많았던 옛 시절을 얘기하며 1960년대처럼 좋은 친구가 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93년 당시엔 이미 대통령이 된 YS가 어떻게 해서든 DJ의 정계복귀를 막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92년 12월 치러진 제14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영국으로 떠났던 DJ는 93년 7월 4일 돌아왔다. 이날 오후 김포공항에 내린 DJ는 흥분했다. 수천 명이나 되는 지지자들이 공항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DJ는 귀빈실이 아닌 일반출구로 나왔다. 거기서 김홍일·김홍업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기택 민주당 대표와 YS가 보낸 김덕룡 정무1장관, 주돈식 정무수석 등도 마중 나왔다. DJ가 모습을 드러내자 공항은 “김대중”을 연호하는 소리에 뒤덮여 버렸다. 순식간에 DJ는 인파에 휩싸였다. 사람들에게 떼밀려 이희호 여사를 놓친 DJ가 “집사람 어딨나? 집사람” 하면서 찾아야 할 정도였다. 앰프에서는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대선에 패배해 스스로 유배를 떠났던 정치인의 귀환이 아니라 개선장군이라도 들어오는 분위기였다.

동교동 자택에도 추석이나 설날처럼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DJ는 마당의 잔디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지지자들의 인사를 받았다.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꽃구경 갔을 때, 또 자서전을 만들러 찾아온 김영사 제작진과 지난날을 회상하며, 몇 번 웃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함박꽃 같은 웃음이 피어나는 건 처음이었다.

한 기자가 물었다. “YS와 만날 생각이 있습니까.” DJ가 농담조로 받았다. “YS가 누굽니까? 정치를 떠난 사람에게 정치 용어로 물어보면 안 되죠.” 또 다른 기자가 뒤를 이었다. “YS가 공항에 김덕룡 정무장관 등을 보냈던데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YS를 못 만날 이유가 없지만 내가 정치를 한다는 의혹을 살 테니, 나중에 국민의 여론을 보고 만나겠습니다.”

기자들 질문에는 그렇게 답했지만 DJ는 여론의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보고를 하러 들어가자 DJ가 물었다. “신문들이 내 귀국에 대해 뭐라고들 보도하고 있나요. 그리고 어떤 신문이 내 정계복귀에 관심을 갖고 있죠?” “H신문 하고 D일보가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지금까지는 YS의 독무대였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못할 거란 분석이 있고, 일부에선 총재님이 YS를 도울 것 같다는 기대도 합니다.” DJ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인 8월 1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DJ가 도쿄에서 납치됐다 생환한 20주년 기념행사였다. 동교동은 거의 한 달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DJ가 국민의 관심을 끌 첫 작품이었다. 한데 바로 전날인 12일 저녁 7시30분, 모든 TV 자막에 YS의 긴급 발표가 떠올랐다. ‘금융실명제 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 명령제’, 그러니까 실명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전 언론이 발칵 뒤집어졌다. 워낙 큰 사안이었다. DJ의 기념행사 따위는 신경 쓸 여지도 없어 보였다. 동교동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가 하늘 쳐다보는’ 꼴이 돼버렸다. 일산 아파트에 보고하러 가자 DJ는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면서 화를 삭이느라 녹차만 마셔댔다. YS는 정말로 DJ의 첫 행사에 재를 뿌리기 위해 실명제 발표 시점을 조정한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까. 지금도 모르겠다.

언론은 별 관심을 안 뒀지만 DJ의 생환기념 행사에는 2000명 가까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날 DJ는 정치에 한 발짝 더 접근해 들어갔다. 그는 통일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주장을 했다. ▶통일의 주체는 국민이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개방해야 한다 ▶통일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그걸 가지고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통일 문제 얘기지 정치는 아니다. 하지만 국민투표까지 할 상황이 되면 통일 논의를 주도해 온 DJ는 국민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모든 걸 청와대 중심으로 진행하려던 YS의 입장에선 펄쩍 뛸 일이었다.

DJ의 정계복귀를 준비하는 움직임은 민주당 내에서도 차곡차곡 추진되고 있었다. 9월 4일, 서울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내외문제연구회’가 발족했다. 민주당 내의 동교동 계파모임이었다. 권노갑·한광옥 최고위원과 허경만 국회 부의장이 각자가 운영하던 연구소를 해체하고 하나로 합친 것이다. 발족식에선 권·한 최고위원이 상임고문으로 선출됐다. 민주당 전체 의원 75명 중 57명이 가입한, 당내 동교동 계파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DJ는 그와는 별개로 아태재단을 세계적인 수준의 단체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9월 21일부터 22일간 독일·러시아·미국 등을 돌며 해외 네트워크 구축에 나섰다. 독일 나우만 재단, 러시아 고르바초프 재단, 미국 지미 카터 재단과 브루킹스 연구소를 각각 방문해 앞으로 출범할 아태재단과의 교류 협력을 합의했다.

아태재단 사무실은 그해 가을에 얻었다. 동교동 자택 건너편에 있는 아륭빌딩 2개 층을 임대했다. 윤철상 전 의원이 ‘고려무역’이라는 이름으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DJ의 새로운 사무실이라는 게 알려지면 임대를 못할지도 몰라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집기까지 다 들여놨는데 건물주가 난색을 표시했다. “세무사찰을 받을 것 같다”며 울상이었다. 다행히 건물주가 전남 영광 출신이어서 가까스로 설득했다. 아태재단은 94년 1월 27일 출범했다. 필리핀의 아키노 전 대통령과 데메지에르 전 동독 총리 등이 참석한 현판식은 성대했다.

돌이켜보면 정치인의 성패에는 운(運)도 적잖이 작용하는 것 같다. DJ가 아태재단을 출범시킨 94년은 북한 핵 사태가 요동쳤다. 그 전해에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북한은 핵 연료봉 추출을 감행했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공습을 단행할 태세였다.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태재단을 중심으로 국제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남북 통일과 북핵 문제를 연구하던 DJ로선 자연스레 활동반경을 넓힐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94년 5월 워싱턴을 방문한 DJ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북핵 사태를 풀기 위해 방북을 권유했다. 청와대는 반대했다. 하지만 카터는 6월 15일 방북해 김일성을 만났고,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선물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카터가 북한에 간 건 DJ 때문인데 정상회담은 YS가 해 역사에 남겠구나” 하면서 억울해했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7월 8일에 김일성 주석이 돌연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날 DJ는 힐튼호텔에서 미국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지에 기고할 ‘문화는 운명인가’라는 짧은 논문을 검토 중이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가 포린 어페어지 3~4월호에서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의 가치는 다르고, 민주주의 형태도 다르다”고 주장한 것을 반박하는 글이었다. 사망 소식을 전하는 TV를 본 뒤 전화로 보고하자 DJ는 “뭐여, 그게 무슨 말이여?”라며 깜짝 놀랐다. 그리고 “진보·보수·중도성향 학자들 분석을 취합해 호텔로 오라”고 했다. 학자들은 대부분 북한이 붕괴되거나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런 보고를 하자 DJ가 고개를 저었다. “북한에 큰 변화는 없을 거예요. 대신 북핵 문제는 장기화될 겁니다. 북핵은 김일성 주석밖에 전권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김정일 위원장은 그걸 해결할 경험과 힘이 없을 겁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안타까운 일이에요.”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DJ가 말했다.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는데 그 요인 중 하나가 내부 분열 때문이에요. 구한말만 보세요. 서재필 박사는 개화로 가자고 하고, 녹두장군 전봉준은 외세를 배제하자고 했지만 두 분 다 봉건체제를 타파하자고 했어요. 개혁으로 보자면 서재필과 전봉준이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비슷한 시대를 살았어요. 그런데도 한 번도 서로 만나 생각을 교환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만났으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내가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때 꼭 대좌를 해서 우리 민족의 진운을 논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 돼서 안타까운 심정이에요.”

DJ는 이미 어둠에 쌓인 호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김일성 주석이 사라진 지금, 그 아들인 김정일 위원장이라도 만나봐야겠다는 결심은 이미 그때 DJ의 마음속에서 싹텄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리=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kimc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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