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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 차이나]역사를 바꾼 유언비어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유언비어(流言蜚語)는 거짓말이다. 요망한 말(謠言)이자 쉽게 퍼지는 말(流言)이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유언비어의 역사도 길다. ‘유언비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디어’라는 말도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자 한국과 중국에서 방사선과 소금과 관련한 각종 유언비어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퍼졌다. 지난 1월 중국의 ‘남방도시보’에 ‘유언비어-역사를 바꾼 도화선’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거짓된 말이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유언비어의 역사를 살펴봤다.

유언이란 표현은 『시경(詩經)』에 처음 등장한다. ‘유언비어로 임금을 대하니 도둑들이 나라안을 소란케하네(流言以對, 寇攘式內)’ 대아편의 구절이다. 유언은 뿌리도 잎도 없는 소문이라는 뜻이다. ‘비(蜚)’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떡풍뎅이라는 이름의 벌레이다. 비어(蜚語)는 ‘냄새나는 얘기’쯤으로 풀이된다. 더러는 비어(飛語)라고도 쓰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이다. 비어(蜚語)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두영(竇嬰)ㆍ전분(田蚡) 열전에 처음 보인다. 한(漢)나라 초기 효경제(孝景弟)에서 무제(武帝)로 넘어가는 시절이다. 승상을 역임했던 두태후의 조카 두영과 효경제의 황후의 동생 전분 그리고 오초(吳楚)의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던 장수 관부(灌夫) 세 사람은 서로 갈등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두영을 비방하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한무제는 두영에게 사형을 명령했다. 유언비어의 ‘비어’는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한나라보다 앞서 진(秦)의 진시황도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호이다)"와 같은 유언비어가 재위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진시황의 제국은 바로 아들 대에서 망했다. 멸망의 도화선은 "대초흥, 진승왕(大楚興, 陳勝王)"이란 유언비어 한마디였다.

고대로마의 황제도 유언비어로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러다 보니 공공유언비어 감찰관을 임명해 군중 속에 침투시켰다. 군중의 말 속에서 유언비어를 찾아내도록 했다. 민중의 정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필요하다면 유언비어 감찰관은 자신이 만들어낸 유언비어로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서기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런 유언비어가 돌았다. “폭군 네로는 화재로 죽은 사람을 위해 슬퍼한 것이 아니다. 그는 화재를 찬미했다. 화염이 불사르는 아름다움에 도취됐다.” 자기 방어를 위해 네로는 서둘러 새로운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보다 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던 기독교인들이 도시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이에 로마 시민들은 희생양이 된 기독교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애초 화재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네로였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후에도 유언비어는 끊이지 않았다. 단 고대에는 교통·통신·미디어·인구 등의 제한으로 유언비어의 전파속도나 규모가 모두 근대와 비교할 수 없게 더뎠다. 1768년 청(淸)나라에서는 요술(妖術)에 관한 유언비어로 전국이 대공황에 빠지고 수천 만 명이 영향을 입었다. 변발을 잘라 영혼을 훔치는 귀신이 횡행한다는 유언비어였다. 하버드대 교수 필립 쿤은 그의 명저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Soulstealers)』에서 이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변발은 청나라 만주족이 한족의 복종을 확인하는 잔혹한 수단이었다. 건륭제는 ‘규혼안(叫魂案, 혼을 불러들인 사건)’을 잔인하게 조사했다. 적발된 하지만 무고한 용의자의 목을 하나하나 잘라버렸다. 당시 건륭제가 두려워한 것은 유언비어 자체가 아니었다. 유언비어가 불러올 사회 집단심리의 변화와 행위의 변화였다. 더 중요한 것은 유언비어사건을 통해 관료들을 심도 있게 관찰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건륭제는 자신이 이미 일반적인 영역에서 관료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민족 정권의 합법성과 안정성에 위협이 되는 유언비어에 통치자들은 엄중히 대처해야만 했다.

건륭제 시대는 청나라의 마지막 태평성대였다. 가경제와 도광제 이후 난세가 닥쳤다. 대규모 유언비어가 샘솟듯 분출했다. 예를 들어 태평천국군과 청군의 결전 과정에서 양쪽은 모두 유언비어를 비정규무기로 사용했다. 홍수전(洪秀全)은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내가 만주족의 시말을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 조상은 하얀 여우(白狐) 한 마리, 붉은 개(赤狗) 한 마리가 교합해 나온 것이다. 요인(妖人)을 낳았으며 종류가 많아지면서 스스로 교합했으나 인륜에 동화되지 못했다.” “전 위요(僞妖) 강희제는 암암리에 만주족 한 명에게 열 개 가(家)를 관리하게 해 중국 여자와 음란한 짓을 벌였다. 이는 중국인을 모조리 오랑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청나라 군대도 그 즉시 유언비어를 만들어 반격전을 벌였다. “(태평군)이 지나간 곳에서는 선박은 크기를 불문하고, 사람은 빈부를 불문하고, 모조리 빼앗아 풀 한 포기 남기지 않았다.” “태평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옷가지를 빼앗기고 은전을 약탈당하는데 은 다섯 량을 도적에게 바치지 못하면 즉시 머리를 자른다.” 증국번(曾国藩)은 이런 유언비어를 만들어 사람들을 사방에 보내 퍼뜨렸다. “천부(天父)는 천형(天兄)을 죽이니, 강산을 얻을 수 없다. 장모(長毛, 태평군)는 바른 주인이 아니다. 여전히 함풍제에게 양보해야한다.” 우리는 증국번이 승리한 것을 유언비어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효과적으로 상대방의 유언비어에 대응해 상대방이 퍼뜨린 유언비어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퍼뜨리지 않았더라면(『토월비격(討粤匪檄)』에 잘 드러난다) 아마 승리는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유언비어의 선동력은 강하다. 1891년 중국에 진출해있던 거의 모든 서방 선교사들은 절망을 느꼈다. 그들은 홍수 같은 유언비어에 포위됐다. 유언비어에서 그들은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어린이들을 납치하며 인체 장기를 매매하고 우물에 독을 타며 중국인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각종 나쁜 짓을 모두 한다고 했다. 원한은 유언비어 속에서 성장하고 결국은 분노한 민중이 창장(長江) 연안의 여러 도시들에 있던 교회를 습격하고 선교사와 교인을 약탈해 죽였다. 역사서에서 ‘창장교안(長江敎案)’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는 의화단의 난 이전에 가장 심각했던 반기독교사건이었다. 교안에서의 유언비어는 그 유래가 길었다. 단지 1891년 서적, 신문, 전단 등의 방식으로 집중적으로 전파되었을 뿐이다. 일찍이 청나라 초기에 고염무(顧炎武)는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에서 천주교회가 어린아이를 삶아먹는다고 적었다. 천주교회가 눈을 파낸다는 것은 옹정제 때 오덕지(吳德芝)의 『천주교서사(天主敎書事)』의 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광(道光) 22년 위원(魏源)이 쓴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도 “서양시장에서는 중국의 흑연 100근을 은 8냥과 바꾼다.……은을 만들려면 반드시 중국인의 눈동자를 써야 한다. 서양인의 눈으로는 소용이 없다.” 이런 괴담이었다.

유언비어 자체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역사를 바꾸는 핵심 요소가 될 수는 있다. 경제학자이자 민주당파 인사였던 장나이치(章乃器)의 아들인 장리판(章立凡)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확하다. “사회운동은 어떤 때에는 진상이 필요하지 않다. 유언비어 하나가 폭동을 일으킬 수 있고, 역사를 바꿀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심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진상은 아니다. 그저 큰 변화일 뿐이다.”

신해혁명도 어떻게 보면 유언비어의 산물이었다. 1911년10월9일 오후 3시, 당시 혁명당인들은 한커우(漢口)에서 실수로 폭약을 터뜨렸다. 거의 같은 시간에 “청나라 정부가 혁명당인을 붙잡아 죽이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마침 신군(新軍) 안에서 떠돌았다. 10월10일이 되자 이 유언비어는 더욱 구체화됐다. “청나라 정부는 현재 변발을 하지 않은 혁명당인을 붙잡고 있다.” “관리들은 이미 혁명당인들의 연명부를 장악하고 있다.” 당시 신군 사병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변발을 하지 않았다. 소문 속의 연명부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자신이 거기에 적혀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공포는 신군내에서 만연했고, 공포는 새로운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유언비어는 더욱 큼 공포를 몰고 왔다. 이때, 쿠데타에 참가하는 것이 많은 사병들에게 스스로를 지키는 최선의 선택으로 된 것이다. 10일 저녁, 한 소대장이 점호하다가 발생한 작은 다툼이 졸지에 쿠데타가 되고 결국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신해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항상 유언비어를 쉽게 받아들이고 전파에 참여할까? 1942년 미국 두 명의 학자는 유언비어의 전파와 받아들임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여기서 ‘유언비어지수(信謠指數)’를 계산해 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유언비어를 쉽게 믿으며 45살 이상의 사람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쉽게 유언비어를 믿었고, 유태인들이 비유태인들보다 더 쉽게 유언비어를 믿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더 쉽게 믿는 것은 그들이 현상을 변화시키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45세 이상의 사람들이 더 쉽게 유언비어를 믿는 것은 그들의 정보채널과 정보분석능력이 상대적으로 낙후됐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이 유언비어를 더 쉽게 믿는 것은 전쟁 시 유태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안전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유언비어는 왕왕 사람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언비어를 사회학자들은 'R=i*a'라는 공식으로 설명한다. 'R'은 유언비어의 크기다. 'i'는 사람들의 관심이다. 'a'는 그 화제와 관련된 증거의 애매성이다. 가령 관심이 쏠리는 화제의 근거가 애매할수록 유언의 크기는 부풀어난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근거의 애매성은 불확실한 발표나 믿기 어려운 보도 등으로 더욱 커질 수도 있다. 때문에 유언을 줄이는 '물리적 처방'으로는 정확한 발표와 충실한 보도가 제시된다.

프랑스 학자 장 노엘(Jean-Noel Kapferer)은 『유언비어(Rumors; Uses, Interpretations, and Images)』라는 책에서 유언비어에 대해 새롭고 독특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유언비어는 항상 ‘진실한 것’으로 봤다. 유언비어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유는 권력이 이 정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 알고 싶으나 정부가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할 때 유언비어가 횡행한다. 유언비어는 정보의 블랙마켓이다. 유언비어를 막으려해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유언비어는 셜록 홈즈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상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언비어는 원한을 모아놓은 무당과 같다. 그저 사람들이 응당 그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 새로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옛날의 빚을 청산하는 것이다. 유언비어를 막으려는 노력은 종종 부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유언비어를 막는 것은 사람들의 환상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광하는 사람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평범한 현실로 돌아오라고 호소해도 백일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언비어는 사회현상이다. 또한 정치현상이다. 일종의 권력에 대한 반항이다. 비밀을 폭로하고 가설을 내놓음으로서 당국이 입을 열도록 만드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사회 군중심리 구조의 거울이다. 사실과 거짓을 막론하고 유언비어는 모두 가치가 있다.

유언비어는 단지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유언비어는 역사적인 거대 이벤트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변의 해설자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너무도 많은 유언비어가 있었다. 어떤 것은 그 자리에서 소멸된다. 어떤 유언비어는 쉽게 도망친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시전설 혹은 역사의 신화로 바뀐다. 도시전설은 유언비어의 연속극이다. 예를 들어 바늘로 찌르는 미치광이에 대한 유언비어가 1922년 프랑스 파리에서 성행했다. 80여 년이 흘러 중국 대륙에서 ‘에이즈 주사기로 찌르는 미치광이’ 전설로 바뀌어 또 한번 널리 퍼졌다. 역사의 신화는 유언비어의 최종형식이다. 예를 들어 의화단운동은 1901년에서 1920년까지 우매ㆍ미신ㆍ야만의 신화로 인식됐다. 1924년부터 1937년에는 민족자존심과 항쟁의 열정을 포함한 반제국주의 기치의 정의로운 신화가 됐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더더구나 반봉건ㆍ반제국주의의 위대한 군중운동의 신화였을 뿐만 아니라 홍위병들의 정신적인 젖줄이 됐다. 20세기 80년대 이후 의화단운동은 다시 우매ㆍ야만ㆍ미치광이 신화로 되돌아갔다(중국 사학자 폴 코헨은 History in Three Keys: The Boxers as Event, Experience, and Myth라는 저서에서 ‘사건’, ‘경험’, ‘신화’라는 세 가지 코드로 의화단 운동을, 더 나아가 역사의 본질을 분석한 바 있다). 단지 시시때때로 여전히 애국주의라는 면사포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진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역사적 진상’은 그것 자체가 아마도 최대의 역사의 신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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