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미 북한 경제대표단 "우리는 관료…시장경제 배우러 왔다"

미주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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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북한 경제대표단이 22일 강의가 진행될 UC샌디에이고 산하 국제분쟁협력연구소(IGCC)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주영성 기자

21일 오후 5시30분 샌디에이고 인근 라호야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 에스탠시아. 유리창을 모두 짙은 검은 틴트로 가린 리무진 버스에서 12명의 북한 경제대표단이 내렸다. 대표단은 UC샌디에이고 산하 국제분쟁협력연구소(IGCC) 수전 셔크 소장의 초청으로 왔다. 여기서 1주일간 소비자 행동론 등 자본주의 경제론을 배운다.

북한 경제대표단이 묵고 있는 호텔은 경비원을 고용해 처음부터 철저히 기자의 접근을 막았다. 심지어 취재기자가 묵고 있는 방이 2층에 위치한 북한 대표단 숙소와 붙어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는 기자에게 방을 3층으로 옮기라고 해 결국 3층으로 방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철통 같은 북한 대표단 보호작전도 '식후 끽연' 시간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날 오후 9시30분쯤 저녁 식사 후 숙소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러 나온 이들 일부와 인터뷰가 이뤄졌다.

대표단은 2층에 위치한 독방을 사용했지만 흡연이 허용되는 발코니가 있는 숙소로 여러 명이 몰렸기 때문이다.

기자는 1층 잔디 밭에서 까치발을 한 채 흡연 4인방에게 '중앙일보 기자'라고 알렸다.

"가서 식사나 하라우. (안그러면) 병 나."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걸쭉한 북한 사투리를 듣고서야 제대로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미국 방문 목적이 뭡니까.

"미국 경제를 보러 왔습니다" 일행 중 한 명이 답했다. 어디서 왔냐고 묻자 자신들은 모두 경제관료라고 했다.

-미국 경제 많이 배우셨나요.

"이제 시작인데…. 오늘 하루종일 길에서 보냈어."

- UC샌디에이고에선 뭘 배웁니까.

"동무가 초청한 것도 아닌데…. 학교 측에 물어 보라우."

-시장경제를 배운다고 하는데.

"어떻게 알았어."

-북한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배울 이유가 있습니까.

"…"

-김정은 장군이 잘 통치하고 있습니까.

"…"

"(우리는) 정부관리들이라 (그런 질문은) 곤란합니다."

일행 중 한 명이 발코니로 통하는 창문을 꼭꼭 닫고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호텔 측에 물어보니 발코니에선 흡연이 가능하지만 담배연기가 방 안으로 들어가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호텔 또는 주최 측이 호텔 내 흡연에 대해 강하게 주의를 준 모양이다.

-일본 대지진 소식도 들으셨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진은 자연재해인 것을…. 안타깝지요."

-이집트와 리비아 사태도 알고 계십니까.

"(우리도) 귀머거리가 아닌데…이만 하겠습니다."

이들이 묵고 있는 숙소 중 일부는 자정 넘겨서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숙소 창 밖으로는 리비아 사태 속보를 전하는 폭스뉴스의 TV화면이 실루엣이 돼 비치고 있었다.

김기정 기자 샌디에이고=주영성 기자

북한 주민, 이집트·리비아 사태 아는가? "피곤합니다. 선생도 어서 가서 쉬라우"
-호텔 경비원들 본지 취재 막아-

북한 경제대표단은 22일 호텔 도착 후 간단한 미팅을 가진 다음 초청자인 수잔 셔크 국제분쟁협력연구소(IGCC) 소장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만찬은 오후 6시부터 3시간 가량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와인도 서너병을 비웠다. 만찬장 역시 기자에게 '북한 경제대표단에 말을 걸면 호텔에서 내보내겠다'는 경고와 함께 접근이 제한됐다.

12명의 북한 대표단 중 지도급으로 보이는 4명이 수잔 셔크 소장과 함께 앉았고 나머지 8명은 IGCC관계자와 함께 식사를 했다. 만찬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비원의 안내를 받은 대표단은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이날 저녁 식사 후 담배를 피기 위해 발코니로 나온 북한 대표단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행운이었다.

2층의 몇 명과 얘기를 나눈 다음 다른 방 발코니에서 의자에 편히 앉아 긴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한 명에게 말을 걸었지만 눈은 감은 채 "쉬는데…프라이버시"라는 짧은 답만 나왔다. 북한 주민들도 이집트 리비아 사태를 알고 있느냔 질문엔 "피곤합니다. 선생도 어서 가서 쉬라우"란 말로 더 이상의 말을 막았다.

다음날. 북한 대표단의 아침은 오전 6시30분쯤 TV를 시청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 시간 뒤 일행 중 5명이 먼저 식사를 위해 호텔 내 식당을 찾았다. 3명은 편안한 와이셔츠 차림이지만 2명은 김일성 배지가 달린 정장차림에 올백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화없이 묵묵히 아침 뷔페음식을 먹었다. 일부는 양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음식을 남겼다.

옆 테이블에 앉은 기자가 "잘 주무셨느냐"고 묻자 대표단 중 선임인 듯한 사람이 "식사 중입니다"라고 말을 끊었다. 어제 저녁의 발코니 인터뷰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호텔 로비에 모여있는 북한 대표단에게 기자가 다가가자 대표단 일행 중 한 명이 "나가라우"라고 소리를 쳤다.

결국 호텔 경비원으로부터 "3분 내에 짐을 싸서 호텔을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경비원은 "이 시간 이후로는 대표단이 나갈 때까지 호텔 투숙을 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북한 대표단은 호텔에서 10분 정도를 걸어서 UC샌디에이고의 IGCC건물까지 이동했다.

이들은 이번 주말까지 이 건물 강의실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소비자 행동 등에 대한 수업을 듣는다. 강의실은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밀실 구조다.

이들의 '자본주의 학습'이 김정은 후계 체제와 맞물려 북한이 시장경제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수순인지 관심이 쏠린다.

1주일 뒤 이들 대표단이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올 때쯤이면 그들의 손엔 '북한 시장 경제' 파종을 위한 작은 씨앗이 담기지 않을까 자못 궁금하다.

김기정 기자 샌디에이고=주영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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