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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차에 실려 갈 길 건강할 때 걸어가보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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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입니다. 고향까지 걸어가면서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새 출발의 동력을 충전하겠습니다.”

 정상명(60·사진) 전 검찰총장은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고향인 경북 의성을 향해 출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 의성까지 거리는 240km다. 정 전 총장이 이 거리를 10일간 도보로 주파하는 도전에 나섰다. 수구초심은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을 향해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정 전 총장은 3년여 전 검찰에서 나온 뒤 친구들과 고향까지 걸어서 가보자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이제 실행에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검은 리본 달린 영구차 타고 고향에 간다”며 “살아 있을 때 내 몸으로 내 다리를 움직여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나이가 들고보니 고향 갔다 오는 건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오늘은 첫날이라 청계산 입구 원터골, 판교·분당, 경찰대학 앞길을 거쳐 용인까지 30km를 간다”며 “가급적 선조들이 과거 보러 오가던 옛길을 이용해 쉬엄쉬엄 갈 것”이라고 했다.

 정 전 총장의 별명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다. 전국시대에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무너뜨린 오다처럼 조직 장악력이 뛰어난 데다 다혈질의 기질이 닮았다고 해서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시 17회 동기생 모임인 ‘8인회’의 핵심멤버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걷기의 묘미’에 빠지면서 전보다 느긋해졌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고 한다. 차 타는 대신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고 도심 이곳저곳을 산책해 보니 그동안 안 보였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상상력도 크게 길러졌다는 게 정 전 총장의 설명이다.

 그는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시간 구애 없이 할 수 있는 게 걷기”라며 “내가 계산해보니 도심에선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이 차 타고 갈 때보다 2배 정도 더 걸릴 뿐”이라고 했다. 정 전 총장은 “검찰총장 할 때는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며 “그때보다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내가 고향까지 걸어간다고 하니 아내도 바지와 양말을 새로 장만하는 등 나보다 더 분주하더라”며 “이때 뭘 이런 걸 샀느냐고 아내를 타박하지 않고 아내의 역할과 나의 역할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부부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달 초 고검장급 인사를 둘러싸고 이귀남 법무부 장관과 김준규 검찰총장 간에 불거졌던 마찰을 의식한 듯한 말을 했다. “조직 대 조직의 관계는 원래 냉정한 것인데 그 사이에 감정이 끼어들면 갈등이 생긴다”고 했다. 이어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관계도 각자의 역할을 이해하면서 가야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고 조직도 산다”고 조언했다.

 정 전 총장은 “이번 고향길 걷기를 마치면 다음달 말 강원도 홍천에서 열리는 24시간 동안 100km 걷기대회에도 나갈 것”이라며 웃었다.

글=조강수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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