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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끝없이 리스크 선택하며 경제 일군 모험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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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정희 시대(The Park Chung Hee Era)"(사진)란 두툼한 논문집(744쪽)을 출판했다. 다음 달 1일 일반에 시판된다. 5·16군사정변 50주년을 앞둔 시점이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아래사진)와 김병국 고려대 교수가 공동 편저했다. 보겔 교수는 1991년 ‘네 마리의 작은 용’에서 유교 윤리가 접목된 동양식 자본주의 정신이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해 주목받았다.외국에선 호르헤 도밍게즈 하버드대 부총장을 비롯해 4명의 동아시아 전문가가 참여했다. 국내에선 진보·보수를 아우르는 19명의 교수들이 글을 썼다. 박정희 시대의 정치·경제·사회·국제관계는 물론 중국·일본·대만·남미 국가와의 비교연구가 포함돼 있다. 주제가 다양하고 필자가 많아 출판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김 교수는 “97년 보겔 교수와 출판을 기획한 뒤 13년 만에 책이 나왔다”고 전했다.

책의 가장 큰 주제는 박정희 시대의 역동적 성장이다. 그 시대의 고민과 딜레마, 꿈과 고뇌도 담았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박정희를 ‘한국의 메이지(明治)가 되고 싶었던 인물’로 묘사했다. 메이지가 됐는지 여부는 평가하지 않았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유신의 형성 과정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견주어 설명했다. 운명의 여신이 선물하는 기회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현실화시켜 유신을 만들어가는 군주로 박정희를 그렸다.

보겔 교수에게 e-메일을 통해 물었다.
-'박정희 시대'의 출판 동기는 뭔가.
“박정희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 근대화의 길을 돌파해 낸 핵심 지도자다. 그럼에도 박정희 시대는 한국 사회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공과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다. 그런 탓에 박정희 시대를 균형 있게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이해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덩샤오핑(鄧小平)과 관련한 책을 올 가을 하버드대에서 출판한다.”

-덩샤오핑과 비교하면 박정희는 어떤 지도자인가.
“박정희의 발전 경험은 중국이 78년 겨울 이후 개혁·개방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물론 차이점이 있다. 이번에 출판된 '박정희 시대'와 앞으로 펴낼 '덩샤오핑'에서 이것을 언급할 계획이다.”

-하버드대에서 한국 현대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뭔가.
“존 페어뱅크 교수와 고(故)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를 포함한 많은 학자가 동아시아 국가의 발전 경험에 주목했다. 나 역시 일본·중국 연구에서 출발했지만 한국의 발전에 관심이 많다.”
공편자인 김병국 교수는 박정희 연구로 88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정희 시대와 멕시코의 안정성장시대(54~82년)를 비교했다. 18일 그를 만나 '박정희 시대'의 출판 배경을 들었다.

-'박정희 시대'가 하버드대에서 출판된 의미는.
“박정희 시대의 공과는 국내에서 여전히 논란거리다. 하지만 역사는 무 자르듯 공과 과로 나우어지지 않는다. 약탈국가대 주권국가, 주권대 종속, 보수대 진보의 이분법으로 보면 놓치는게 많다. 이번에 출판된 책은 박정희 시대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잣대를 제시하고자 했다.”

-과거의 박정희 연구와 다른 점은 뭔가.
“나 역시 기존의 이분법적 개발국가론에 따라 박정희 시대를 연구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러나 개발국가론에선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리더십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정치와 리더십에 주목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다.”

-출판 계기는.
“97년 하버드대의 아프리카 개발관련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발전 경험을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이 아프리카 수준의 어려운 환경에서 경제성장으로 나간 요인이 무엇일까 다시 돌아보게 됐다. 당시 보겔 교수는 거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이 크게 성공한 이유에 대해 관심을 쏟던 때였다. 그와 함께 13년간 이유를 찾았다.”

-박정희 시대는 어떤 시대였나.
“거시지표로 보면 평균 성장률 8.5%의 고도성장시대였다. 하지만 경제 성장만 놓고 보더라도 폭과 깊이가 널뛰기했던 불확실하고 아슬아슬한 시기였다. 13%를 성장한 시기가 있지만 저성장에 이어 마이너스 성장으로 추락한 시기도 있었다. 외환보유액이 언제든지 바닥날 수 있는 불안한 나라였다. 8.5% 성장률 속엔 수많은 고민과 긴장과 갈등이 있다.”

-박정희는 그런 시대를 어떻게 이끌었나.
“엄청난 리스크 테이크를 하는 모험가였다. 그는 보통사람이라면 택하지 않을, 또 택하지 못할 리스크를 계속 선택해 나갔다. 박정희의 전략은 3H로 설명할 수 있다. 고위험, 고성장, 고비용(High risk, High payoff, High cost)이다. 민간부문과 기업을 확장시켰지만 시장방식이 아니었다. 1965년엔 정기예금 금리를 하룻밤 새 연 15%에서 연 30%로 올려 은행으로 돈을 끌어 모았지만 대출 이자율은 그보다 낮춰 투자 위축을 막았다. 역금리제다. 또 사채시장을 혼수상태에 몰아 넣은 1972년의 8·3 사채 동결조치도 마찬가지다. 재정으로 기업을 지원하고 채무를 완화시켰다. 그런데 그런 돈이 기업 투자로 이어질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겠나. 대박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대박 나게 만들었고, 그러기 위해 많은 비용과 희생이 따랐다. 박정희는 그런 길을 갔다.”

-왜 그런 길을 가게 됐나.
“당시 한국은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커다란 무역적자를 메우려면 수출이 신장돼야 했는데 수출을 늘리기 위한 기술과 자원이 부족했다. 고학력자의 높은 실업률은 정치·사회 불안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런 어려운 길을 가던 한국이 어느 날 갑자기 길을 바꿨다. 그것은 기존 이론처럼 개발국가론의 관료제로 설명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리더십을 연구해야 문제가 풀린다.”

-다른 나라에선 채택하기 어려운 특수한 성장 모델이란 얘기인가.
“규모가 중간 정도의 국가라면 60년대가 스스로의 힘으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케네디 라운드로 선진국의 관세 철폐가 대대적으로 이뤄져 수출 진흥을 통한 산업화의 창이 열렸다. 선진국이 된 일본은 해외에서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수요가 확대되면서 생산 쪽에선 기술이전이 가능한 시기에 일어났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향후 세계무역은 그런 방식의 산업화가 어렵도록 체제가 바뀌었다. 한국은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갈 수 있는 막차를 탔다.”

-박정희 리더십이 성공적이었단 뜻인가.
“막차인지 여부는 박정희도 몰랐을 것이다. 다만 잘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두 자릿수 고속 성장으로 달려 나간 중국을 생각해 보자. 그때 기회를 놓쳤다면 한국의 산업화는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최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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