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기업, 상생 발맞춰 동반성장의 길 달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1면

삼성전자 직원 16명은 경기도 안성의 ‘신흥정밀’이라는 업체에 매일 출근하고 있다. 이 회사의 제품 개발을 돕기 위해서다. 신흥정밀은 TV의 테두리 등을 만드는 회사. 삼성전자의 신제품 디자인에 맞는 테두리 등을 개발하기 위해 삼성전자가 기술인력을 직접 파견한 것이었다. 협력사의 연구개발(R&D)을 돕는, 삼성전자의 ‘동반성장 경영’의 하나다. 신흥정밀은 이렇게 삼성전자와 협력하면서 쑥쑥 컸다. 1977년 10억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8900억원으로 늘어 1조원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 그룹은 지난해 철판 등 자동차에 들어가는 원자재 약 3조1000억원어치를 구입했다. 현대·기아차가 직접 쓸 것이 아니라, 부품을 만드는 협력업체들이 사용할 원자재였다. 협력업체들이 각각 사지 말고 현대·기아차가 한꺼번에 구매를 하면 싸게 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일종의 공동·대행 구매다.

‘사급 제도’로 불리는 이 제도는 현대·기아차 특유의 상생협력 경영 방안이다. 현대·기아차는 직접 부품 등을 납품하는 1차 협력사뿐 아니라 2, 3차 협력사의 원자재 수요까지 헤아려 일괄 구매를 했다. 현대·기아차는 또 이를 통해 국제 원자재 가격 변동을 바로바로 파악해 협력사의 납품가를 조정해주고 있다.

바야흐로 동반성장·상생경영의 시대다. 대기업들이 거래 관계에 있는 협력 중소기업을 ‘함께 발전할 파트너’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번져가고 있다. 특히 지난해 일본 도요타차의 대규모 리콜 사태 이후 동반성장 분위기가 한층 짙어지고 있다. 도요타차의 리콜은 협력사가 납품한 부품 불량이 원인이었다. 이를 통해 국내 대기업들은 “협력사가 최고가 돼야 우리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대기업 총수들도 연일 동반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구본무 LG 회장은 이달 초 그룹 임원 300여 명이 참석한 임원 세미나에서 “협력사와 동반성장 없이는 LG의 경쟁력 향상도 불가능하다”며 “협력회사와 갑·을 관계라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파트너로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지난해 9월 협력사 최고경영자(CEO) 86명을 초청해 점심 자리를 갖고 일일이 테이블을 돌며 “SK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대기업들의 동반성장 의지가 한층 강해지고 있다는 점은 숫자로도 나타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30대 그룹의 140개 계열사는 올해 협력업체 지원에 모두 1조808억원을 쓸 계획이다. 지난해 8652억원보다 24.9% 늘었다. 이는 30대 그룹의 최근 5년간 연평균 매출 증가율(10.6%)의 2.4배다.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성장 속도보다 더 빠르게 협력사 지원 규모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확산되는 동반성장 분위기에 정부까지 가세했다. 동반성장을 경제·산업계의 확고한 문화로 자리잡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대기업 회장 12명을 초청해 아침 식사를 함께하며 동반성장 추진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당시 이 대통령은 “힘 있는 사람과 가진 쪽에서 상대를 살피고 이해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해 동반 성장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하자”고 말했다.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단의 만남 직후 동반성장위원회(위원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출범했다. 대기업과 중기, 학계 대표 등이 모인 민간협의체이나 운영은 사실상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대기업이 연초 예상보다 많이 이익을 내면 그 일부를 협력중기와 나누는 ‘초과 이윤 공유제’를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도 최근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드러낸 바 있다.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 양금승 소장은 “은연중에 동반성장을 강제하기보다, 동반성장 노력을 많이 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등의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