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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부부 헷갈린다, 연극? 실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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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연극에서 장민호(아래)씨는 남편 ‘장오’로, 백성희씨는 아내 ‘이순’으로 나온다. 겨우내 묵었던 문창호지를 갈아 끼우는 둘의 모습은 정겹다. 막판 반전은 울림이 크다. [사진작가 김호근]

연극을 본다. 그건 꾸민 거고 설정이다. 그걸 누가 모르랴. 근데 이 분들,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부자연스런 데가 없다. 말투나 엉거주춤한 동작, 심지어 대화 중간의 다소 휑한 느낌까지 우리네 실제 생활의 일부분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머리로는 연극이라고 생각하는데, 눈은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고 있는 느낌?

연극 ‘3월의 눈’이 그렇다. ‘백성희·장민호 극장’ 개관작이다. 극장은 지난해 말 서울 서계동 옛 기무사 수송대 부지에 만들어졌다. 배우의 이름을 딴 극장이 생긴 건 국내 처음이다. 그것도 살아 있는 인물의 이름을 딴 극장이 생긴 건 해외에서도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었다. “한국 연극의 정통성이 회복됐다”며 연극인들은 하나같이 감격해 했다.

 그런 역사적 공간에, 처음 올라가는 연극이니 당사자 두 원로 배우 백성희(86), 장민호(87)씨가 출연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터. 근데 이런 의심 들지 않을까. ‘그냥 예우 차원에서 등장하는 거지, 연세도 있으신데 솔직히 연기는 별로 아냐’.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두 어르신, ‘짱’이다.

 7일 극장에서 런스루(run-through·실제 공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연습하는 것)가 있었다. 두 배우, 대사 한마디도 버벅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리얼해 막이 내릴 쯤엔 자연스레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손진책 연출은 “우리 출연 배우가 12명이야. 지난달 중순 대본 연습 들어갔는데, 리딩 첫날 장선생님은 대본을 놓으시더라고. 이미 다 외우셨다는 거지”라고 전했다. 대사량 가장 많은 배우가, 그것도 가장 고령의 배우가 그러는 데 어찌 딴 배우들이 긴장을 안 하랴. 정작 장민호씨는 “난 외우지 않아. 그냥 극중 배역을 분석해. 그렇게 매일 연습하다 보면 나 자신은 없어지고, 그 인물이 되어 있어”라고 말했다.

 백성희씨는 패셔니스타다. 스카프는 세련되고 빨간색 코트는 눈길을 확 끈다. 꼿꼿한 자세, 수줍은 표정, 다소곳한 손짓은 영락 없는 소녀다. 칼칼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사를 쏟아내며 무대를 장악할 때와 영 다르다. 백씨는 “연극인은 순교자가 되야 해”라고 자주 말한다.

 연극은 애틋하고 안타깝다. 대본을 쓴 배삼식 작가는 “명동 어느 오래 묵은 밥집에서 두 분을 처음 뵈었을 때, 거의 반사적으로 하나의 영상을 떠올렸다. 볕 좋은 어느 집 툇마루. 그 고즈넉한 빛 속에 두 분을 앉혀드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번 작품에는 부박(浮薄)한 현실에서, 잊혀져 가지만 결코 놓칠 수 없는 풍경들이 배어 있다. 한옥 공간을 그대로 재연한 무대 역시 고풍스럽다. 두 배우는 1960년대 초 처음 부부 연기를 한 이후 200편이 넘는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 왔다고 한다.

이번 연극은 숱한 위기에서도 이를 헤집고 버텨 여기까지 온 두 노(老)배우의 회한을 포착해 내고 있다. 그건 또 하나의 오롯한 성채 같았다. 한국 연극의 값진 수확이었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사진작가 김호근

▶연극 ‘3월의 눈’=11∼20일.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 극장. 2만, 3만원. 02-327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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