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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비우기 위해 예술 한다는 건 말짱 거짓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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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호 01면

이우환 화백은 “내 그림이 하나만 있어도 꽉 차 보이는 것은 주변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은 액자 안쪽만 보지만 내 그림은 벽면 전체, 공간 전체를 함께 봐야 한다”고 말한다.   조용철 기자

이우환(75) 화백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관 전시가 6월 24일부터 9월 28일까지 열린다.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 ‘생존 작가 30위’ 이우환 화백

아시아 작가로는 백남준(2000년), 중국의 차이궈창(蔡國强•2008년)에 이어 세 번째다. 세계적인 미술시장 분석 사이트 ‘아트 프라이스’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2009년 세계미술품 경매시장에서 한국 작가로는 가장 많은 금액(416만 달러•약 46억원)의 작품이 팔린 작가다. 생존 작가로는 30위, 생존 아시아 작가로는 13위에 해당한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품 활동 및 전시를 하고 있는 그는 인터뷰를 잘 하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2009년 국내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렸을 때도 잠시 티타임만 가졌을 뿐이다. 그런 그를 2월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더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한 시간만 하겠다”던 인터뷰는 점점 열기를 더해 가더니 급기야 네 시간이 다 돼서야 마무리됐다.

그는 대뜸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주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많이 쫓아다니고, 잘모르는 곳에도 가보고, 가서 사람들과 부딪치라고 당부했다. “예술도 경쟁입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1956년 여름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혼자서 세계를 상대로 싸워온 그다. 예술이라는무기 하나만 들고.“예술을 왜 하는가, 마음을 비우기 위해 한다. 이런 얘기는 말짱 거짓말이에요. 욕심이커야 잔 욕심이 없어집니다.”

-그럼 선생님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난 그림에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시•서•화를 가르쳐준 동초 황견용 선생은 내게 ‘솜씨는 있는데 그림 그릴 생각은 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죠. ‘학자나 정치가가 돼야지 그림 그리는 것은 사내가 하는 게 아니다’라고. 그 때문인지 어릴 적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별 볼일 없는 것, 차원이 낮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합리화할까 궁리했죠. 그래서 내게 그림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높고, 멀고, 큰 세계를 감지할 수 있는 일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다는 것을 넘어 공간이 풍요롭게 열리고 그림 너머의 다른 큰 세계를 경험하는 자극을 주자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정리된 생각입니다만.”

-일본엔 어떻게 가게 됐나요.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가 일본 사시는 삼촌께 한약을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삼촌이 그냥 일본에서 지내라며 돌려보내질 않으셨어요. 미대 생활이 재미도 없었고 해서 니혼대학 철학과에 편입하게 됐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원래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철학사상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었죠. 하지만 말을 배워서 문학을 한다는 게도무지 어려웠어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포기했죠.”

-왜죠.
“통일이 우선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군사정권에도 반대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대한민국 국민총생산(GNP)이 점점 올라가고, 편지를 봐도 사는 게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반대가 멋쩍어졌어요. 억지부려야 하는데 성격상 그럴 수 없었죠. 난 정치와는 안 맞는다고 내뺐어요. 그러다 보니그림 그리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고 그리는흉내도 내게 됐죠.”

-‘모노하(もの派)’ 운동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1960년대 말 키네틱 아트라는 것이 일본사회에 상륙했습니다. 착시 현상을 유발하는 예술이었습니다. 일종의 트릭이었죠.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틀렸다고도 옳다고도 할 수 없는 것들. ‘눈앞에 있는 것인데도 믿을 수 없다’라는 생각을 주는, 그래서 현실을 애매하게 만드는 독특한 현실비판에 충격을 받았죠. 미술은 조용히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와 맞물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노하’는 어떤 것입니까.
“산업 생산에 대한 비판, 만드는 것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런 면에서 1968년은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죠. 이 시기를 즈음해 이탈리아에선 아르테 포베라(‘빈약한 미술’이라는 뜻으로 1967년경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전위적인 미술운동. 일상적인 소재를 활용해 작품을 놓는 방법이나 전시하는 공간의 의미를 가미, 작품에 대한 관점을 확장했다),일본에선 전공투(‘전학공투회의’의 약자로 1968년부터 69년까지 일본 각 대학에 결성된 학생운동 연합체)가 나타났습니다. ‘모노하’란 자기 생각은 절반 정도로만 한정하고 나머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바깥과 안쪽을 연결하려는 시도입니다. 돌멩이를 그냥 던져놓는 것 같아도 개념•장소•시간 등을 따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죠.”

-이름은 누가 붙였나요.
“모릅니다. 이 말에는 그림도 못 그리고 조각도 못 만드니까 ‘물건’이나 내다 던져놓는 놈들이라는 비아냥이 담겨 있죠.”

-그런데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볼 수 있나요.
“이 부분은 좀 설명이 필요한데, 예를 들어 쉬르리얼리즘이나 다다이즘 같은 것이 어느날 그냥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미술가들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등장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근대’를 겪지 못했어요.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죠. 어떤 면에서 이 얘기는 전문가들끼리의 문제입니다. 대중이야 볼거리를 찾아다니고 ‘이게 뭐야’ 할 수 있지만, 전문가들까지 그 함정에 빠지면 안 되죠. ‘왜 이랬을까’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시회에서 약간의 생소함이나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건강한 것이죠. 뭔가 내 맘과 안 맞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작품은 시대를 앞서 호흡하는 그 무엇일 것 같은 암시를 주어야 하거든요. 저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만남에는 거리를 둡니다. 대중을 무시하는 게아니라 제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사에서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것이거든요.”

-외국에서 차별은 없었나요.
“나는 미대 출신도 아니고, 나를 받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습니다. 처음엔 잘 받아주다가도 좀 튀는 듯하니 비판하고 소외시키더라고요.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싸우며 살아야 했죠.
게다가 한국에서는 일본 사람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조선 사람이라고 하고, 유럽에서는 동양인이라고 하고, 추천을 받아도 명단에서 빠지고… 항상 경계인이고 외톨이였죠. 그래도 ‘차별 때문에 못해 먹겠다’는 말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나는 패자가 되는 것이니까요.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밖으로 나가라’ ‘싸워서 이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를 줄이고 밖을 받아들이라’는 모노하의 정신도 결국은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현대 철학에서도 중요한 화두인데,남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결국 타자(他者)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타자와의 연계 속에서 살아온 사람, 경계를 넘어 만남을 추구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많이 쓰셨는데, 번역된 책들이 그런 생각을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됐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글은 간단히 써지지 않아요. 생각을 다듬는 데는 글 쓰는 게 최고입니다. 컴퓨터가 발달해도 놀이로서, 재미로서, 하루 20~30분쯤은 손으로 글 써보기를 권합니다.”

-계속 싸우고 계십니까.
“내 내면의 싸움 대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근대주의•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둘째는 내셔널리즘이나 지역성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나 자신의 고집에 대한 것이죠. 이런 것과 싸운다는 것은 내 내부에 그런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한국적이라든지, 일본적이라든지, 유럽적이라든지 이런 공동체적 발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자주 묻는데, 나는 나, 이우환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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