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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시진핑의 경쟁마 ‘리틀 후진타오’ 리위안차오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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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가 리위안차오를 장쑤성 최고위직에 추천하다
1988년7월 리커창은 공청단 제1서기에서 허난(河南)성 부서기 겸 성장대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성장에 선출됐다.

반면에 2000년 리위안차오는 스스로 지방 경험을 쌓고 싶다는 뜻을 상부에 알렸다. 이를 안 후진타오가 노력해서 그 해 9월 장쑤성 공산당위원회 부서기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이듬해 11월 난징(南京)시 시위서기를 겸임하게 됐다.

난징은 여섯 왕조가 수도를 삼았던 고도다. 또, 국민당 임시정부의 수도이기도 했다. 상하이, 베이징, 톈진(天津), 충칭(重慶) 네 직할시를 제외하고는 전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다.

2002년11월 후진타오는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총서기로 선출됐다. 리위안차오도 수월하게 중앙후보위원에 선출됐다.

총서기에 선출된 후진타오는 자신의 복심인 리위안차오에게 더 많은 배려를 해 주게 된다. 2002년12월30일 중공 장쑤성위원회는 전체 성 지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장바이린(張柏林·장백림) 중앙조직부 부부장이 다음과 같은 중앙의 결정을 발표했다.

“후이량위(回良玉·회량옥) 동지는 지금 이후로 장쑤성위서기를 겸임하지 않는다. ……리위안차오 동지를 장쑤성위 제1서기에 임명한다. 리우안차오 동지는 ‘정치에서 견고하고, 전국적인 관점이 강하며, 사상은 예민하고, 정책이론의 수준이 높으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냉정한 두뇌로 대처하며, 사고가 개방적이며, 개척과 개혁의 의지가 강하고, 조직과 지도능력이 우수하며, 임무에 적응이 빠르며, 깊이 있게 일을 처리하며, 대중과 감정을 공유하고, 강한 사업 추진력을 갖고 있으며, 사업에 노력하고, 업무 태도가 바르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간부 대중 사이에서 위신이 높다. 중앙은 리위안차오 동지가 장쑤성위서기에 적임이라고 생각한다.”

리위안차오가 중앙후보위원의 자격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장쑤성위서기에 임명된 것은 후진타오의 배려였다.

리위안차오도 그간의 ‘전통을 계속 이어’ 장쑤성 현대화 발전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고 전중국의 선두에 서서 계속 추진할 것임을 표명했다.

리위안차오가 의기양양하게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때, 중국 경제의 과열에 대해 중앙은 거시적인 조정에 착수했다. 게다가 조정의 첫 표적이 장쑤성의 민영기업 ‘톄번(鐵本)’이 됐다. ‘톄번’은 당시 장쑤성 창저우(常州)시와 성위원회 일부 멤버의 지지로 투자총액 106억 위안의 초대형 제철공장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제철공장이 완성되면 연간 840만 톤을 생산하게 돼, 상하이의 바오강(寶鋼)을 넘어서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창저우시 지도자는 인가 신청을 국토에 고르게 ‘분산화’하려는 중앙을 속였다. 2004년4월28일 원자바오총리가 주재하는 국무원 상무회의에서 장쑤성 ‘톄번’ 건설공사를 즉각 멈추고 책임자를 추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리위안차오는 거대한 압력을 직감했다. 바로 그날 중으로 성 당위·정부합동회의를 소집했다. ‘톄번’프로젝트에 관련된 정부와 은행 관련책임자 8명에 대해 당규약과 정부 기율에 따라 처벌 결정을 내렸다. 또 과열경제에 대한 정리와 행정 처분을 결정했다.

이틀 뒤인 2004년5월1일 후진타오가 베이징에서 장쑤성으로 시찰을 내려왔다. ‘톄번’사건의 처리에 대한 대책을 리위안차오에게 전해줬다. 보도에 따르면 후진타오는 리위안차오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이 지지가 의미하는 정치적 의미는 분명했다.

◇하바드대학으로 유학, 도시발전 이념을 배우다
2001년10월 리위안차오는 난징시위서기를 겸임하고 있었다.

이듬해 8월, 리위안차오는 중공중앙조직부와 국가외국전문가국에 발탁돼 미국 하바드대학 케네디정부학원이 운영하는 ‘발전도상국 지도자’ 양성 클래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3개월간의 양성 코스는 완전히 영어로 이뤄졌다. 코스 내용 대부분이 도시문제를 어떻게 관리하고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사례를 학습하는 것으로 구성됐다. 과정 중 일부는 최신관리이념의 소개였다. 그 가운데 리위안차오의 인상에 깊이 남은 것은 다치 레오나르드 교수의 ‘3권 이론’이었다. 다치 교수는 ‘가치’와 ‘능력’, ‘지지’를 정책 결정의 세가지 요소로 제시했다. 정책 실행과정에서는 이 세 요소 각각이 서로 연결돼 이 세 바퀴가 상호 중첩을 이루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정책 결정에는 가치, 능력, 지지가 필요한데 이 세 개가 동시에 짝을 이루고, 상호 중첩될 때 비로소 정책이 성공하는 것으로 봤다. 따라서 정책결정자는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필요한 보충과 조정을 시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했다.

리위안차오는 학습을 마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학습과 현지조사에서……그 가운데 세계 경제와 과학기술, 도시 발전 가운데 많은 선진적인 것들을 이해했다. 많은 최신 발전 이념, 특히 도시발전이념을 습득할 수 있었다.”

여기서 리위안차오는 ‘녹색 난징’이란 슬로건을 제기했다. 민영경제의 적극적인 발전과 ‘서비스형 정부의 제창’이라는 두 개의 도시발전 방침을 주장했다. 리위안차오는 난징에서 이런 생각을 갖춘 뒤 장쑤성위서기에 취임했다. 이로써 이 슬로건을 장쑤성 전체로 확대 적용할 길이 열린 것이다.

리위안차오의 집정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그가 난징에 있던 당시 자가용 승용차의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도로 확장과 보도에 심어진 가로수 보호를 둘러싼 난징 시민들의 논쟁이 벌어졌다. 리위안차오는 대중들에게 쑨중산(孫中山·손중산) 선생이 제정한 ‘수도계획’을 볼 것을 권장했다. 이 계획에는 난징시 인구가 100만명에 달할 때 도로확장이 필요하게 되지만 현 시점에는 아직 인구가 그 정도로 많지 않아 먼저 나무를 심을 장소를 확보했지만 인구가 늘어날 경우에는 나무를 옮겨 심고 도로를 확장하는 것이 좋다고 기록돼 있었다. 이를 본 난징 시민들은 논쟁을 멈추고 가로수지대를 옮기는 것을 찬성했다.

◇악덕관료를 징벌하고 민주적 평가로 간부를 선발하다
2000년12월 리위안차오는 장쑤성위부서기에 취임한 뒤 간부인사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 부청장급 지도간부의 공개선발을 실시한 것. 중국간부제도개혁의 선도적인 조치였다.

2001년11월 리위안차오는 난징시위서기에 취임하자 마자 ‘주쯔창(朱自强·주자강) 닝보(寧波)기율위원회 위반사건’에 대해 철완(鐵腕)을 휘둘렀다. 주쯔창은 난징 시정공용국장으로 11월26일 네 명의 부하와 함께 닝보호텔에서 여성 직원에게 무례한 행위를 자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연락을 받고 출동해 이를 제지하는 경관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사건이 언론에 폭로되자 리위안차오는 곧바로 요원을 파견해 사건 조사에 들어갔다. 상황을 확인한 리위안차오는 주쯔창을 해임하고 그밖의 사람들도 엄격히 처벌했다.

톄번사건 뒤 리위안차오는 스스로 직접 거시조정을 지휘해 1천여건의 고정자산 프로젝트를 ‘건설정지, 프로젝트 연기’로 나누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기율을 위반한 간부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

동시에 쉬궈젠(徐國健·서국건) 장쑤성위조직부 부장 등 일련의 오직 사건도 당규약과 국법에 따라 엄격히 처벌했다.

규약과 규율을 위반한 간부를 철완으로 처벌한 이외에도, 리위안차오는 ‘인민에게 비판을 청하는’ 방법으로 간부의 업무 태도를 감독하는 새로운 정치를 펼쳤다.

2002년2월 난징시는 1800여명의 처장급 간부가 참가하는 전 도시 ‘업무 풍격 개선의 해’ 동원대회를 소집했다. 난징시의 인민이 각부문의 활동을 공개 평가하고 인민이 레드카드를 내놓을 경우에는 모두 합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평가 후에 부동산국 등 다섯 개 국장급 책임자가 각각 강등, 해임의 처분을 받았다.

리위안차오가 장쑤성위서기로 승진한 뒤인 2004년 하반기에도 전성의 인민이 82개 성급 부문의 활동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순위경쟁’을 시행했다.

리위안차오는 철완으로 악덕관료를 징벌하고 인민의 민주적 평가로 간부를 선발하며, 상벌로 장쑤성의 간부대오를 다스려 ‘서비스형 정부’로 방향을 바꿨다.

◇하늘의 이로움, 땅의 이로움, 사람의 화합을 얻어 중앙정치국위원으로 약진하다
리위안차오가 성위서기에 취임한 뒤 성위원회 간부를 인솔해 저장(浙江), 상하이, 광둥(廣東) 등을 여러 차례 시찰했다. 이들 선진 성시가 경제를 발전시킨 선진적인 경험을 흡수하고, 동시에 경제협력과 공동발전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2004년 초 리위안차오는 중국공산당 성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장쑤성은 사회발전이 비교적 빠르다. 1인당 GDP가 이미 2500달러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발전 과정에서 많은 조화롭지 못한 문제가 드러났다. 장쑤성 북부지역의 1인당 GDP는 800달러 이하다. 나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전체적인 목표는 인간을 기본으로 하고 전면적으로 협조하는 지속발전 가능한 새로운 장쑤성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기초로 장쑤성은 다음과 같은 발전방침을 결정했다.

1. 지금부터 5년간 장쑤성 북부지역에 3700억 위안을 투입해 연해 산업벨트를 건설하고, 쉬저우(徐州)에서 롄윈강(連雲港)에 이르는 동해안 산업밀집 벨트의 형성을 서두르고, 도시를 발전시킨 지역 사이에 현대적인 물류네트워크와 클린 생태 회랑을 만든다.

2. 새로운 라운드 창장(長江) 연안 개발을 실시해 여기에 국제 산업의 이전을 받아들여 현대적인 국제적 제조업 기지의 주요한 기반을 건설한다.

3. 하이테크 산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고, 2010년도 하이테크 산업 총생산액을 1조위안까지 ‘네 배 증가시키는’ 계획을 실시한다. 에너지 소비와 부지면적, 오염도가 낮은 집약형 산업을 크게 발전시킨다. 전자정보설비와 소프트, 바이오 의약, 신소재 등 유력산업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킨다.

4. 대기업전략을 적극적으로 실시한다. 자기지식소유권, 브랜드, 핵심경쟁력을 갖춘 대기업과 대집단을 중점적으로 지지한다.

리위안차오는 장쑤성 순조롭게 경제발전을 추진해 GDP를 연평균 13% 전후로 성장시켰다. 리위안차오는 하늘의 도움(중국공산당 고위층 즉 후진타오의 지지), 땅의 이로움(장쑤성의 지역적, 교통상의 장점), 사람의 조화(장쑤성 간부 대오)를 얻었다. 제17차 당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에서 중앙정치국위원으로 약진했다. 게다가 중앙서기처서기로도 선출됐다. 또, 공산당 간부의 인사를 관할하는 당조직부장으로 임명됐다.

2007년10월26일 리젠화(李建華이건화) 중앙조직부 부부장이 난징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리위안차오 동지는 장쑤성에서 7년여 활동했고, 성위를 주관한 것만 5년이 넘었다. 이 기간은 바로 장쑤성이 발전한 중요한 시기였다. 리위안차오 동지는 심사숙고하고 활동에 노력해 장쑤성의 개혁, 발전, 안정을 위한 성과를 풍부하게 하는 많은 업적을 쌓았다. 장쑤성의 광범한 간부대중과 깊은 유대를 맺었다. 리위안차오 동지의 모든 것을 장쑤성 인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리위안차오를 잘 알고 있던 오랜 지인은 ‘2000년 난징에 온 날부터 리위안차오는 완전히 인간이 변한 것 같았다’라고 회상한다. 그 전까지 리위안차오는 안정적이고 여유가 있었다. 세밀해도 따뜻함이 있었다. 세력이 부족하고 기백도 부족했다. 하지만 난징에 부임했을 때부터는 그때까지의 참모, 브레인으로서의 자세에서 일변해 지방의 고위 관리로서의 말과 행동을 취했다. 해외 미디어들이 그가 ‘후진타오의 정신을 잇고 있다’고 보도하는 것은 적절한 평가다. 그는 후진타오와 같이 세컨맨, 조수로 있을 때에는 저자세로 속내를 말하지 않고,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일인자에 올라 주인이 되자 큰 손도끼를 휘두르며 개혁의 호령을 내 놓은 것이다.

◇시진핑의 잠재적 경쟁자
리위안차오가 당 중앙조직부장에 취임한 후 지방 제후와 국무원의 부처급 위원들의 일련의 인사이동이 이어졌다. 그는 신임정치국위원 중에 가장 바쁜 인물이 됐다.

그는 취임 뒤 3인의 신임 정치국위원에게 종래 직무를 겸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중앙의 결정을 전해 듣고 세 개 성을 시찰했다.

2007년11월1일 리위안차오는 ‘인민일보’에 당내민주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은 “민주적 선거제도를 개선해 당내 선거가 투표권자의 의지를 잘 체현할 수 있도록, 광범한 당원들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고, 당과 인민의 사업에 높은 책임을 지고 당의 지도기관과 지도간부가 선출되는 것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리위안차오가 장쑤성에서 추진한 간부선발은 정치체제 개혁에 있어 약간의 개혁이었다. 이처럼 리위안차오에 대해 후진타오를 톱으로 하는 당중앙은 당내민주를 추진해 민주적 제도를 개선하는 면에서 리위안차오가 대담한 개혁의 도끼를 휘두를 것이라며 두터운 기대를 실어줬다.
중국공산당 정치체제의 민주화는 공산당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인민의 당에 누적된 대규모 정치프로젝트인 셈이다. 리위안차오가 이 고질적인 ‘터부’를 타파할 수 있을까. 중앙서기처에서 시진핑 다음가는 위치에 서 있는 그가 여전히 시진핑의 잠재적 경쟁마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바로 정치개혁의 칼자루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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