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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박명성·박칼린 “ 남들 다 하는 것 하면 뭐 하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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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칼린(앞) 감독과 박명성 제작자

박칼린(44)은 ‘철(鐵)의 여인’ 같다. 그녀와 동의어가 있다. 바로 ‘리더십과 카리스마’다. 누구나 탐내는 덕목이다. 하지만 박칼린은 물러선다. “혼자서 얻은 보물은 아니다.” 극한의 좌절 앞에서 그를 끌어준 남자가 있다. 박명성(49). 공연회사 신시컴퍼니 대표다. 둘은 ‘뮤지컬 동지(同志)’로 12년을 헤쳐왔다. 줄기차게 도전했고, 그래서 성취했다. 박칼린은 “내가 가진 힘, 그것은 다양성”이라고 고백했다. 리투아니아계 어머니, 한국인 아버지의 핏줄을 말한 것이다. 괜히 ‘찰떡 궁합’은 아니었다. 박명성 대표도 다양성의 가치를 말했다. “난, 선택과 집중을 믿지 않는다. 그와 거꾸로 갔더니 어느새 커져 있었다.”

글=김준술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둘이 김치 나눠 먹을 만큼 절친이라죠? 옷깃만 스친 건 아닐 테고. 시작이 궁금합니다.

박명성: 뮤지컬 ‘시카고’를 만들 때였죠. 1999년이에요. 무작정 전화해서 ‘나랑 뮤지컬 같이 하자’고 꼬드겼어요. 그전까진 이름 정도만 알았죠.

박칼린: 처음에 전화 왔을 땐 누군지도 몰랐어요, 하하. ‘더 라이프’란 뮤지컬을 제작했었다는데 아 그걸 만든 사람이구나 떠올렸죠. ‘시카고’ 작품은 진짜 쟁이들이 알아주는 작품이에요. 욕심이 부풀어 올랐어요.

●작품 제안 하나로 ‘운명적 인연’이 가능한가요.

칼린: 박 대표 만나기까지 한국에서 10년간 ‘업 다운’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원래 남자 사귀면 꾸준히 만나지, 바꾸고 그러진 않거든요, 하하. 일도 그래요. 한 군데 소속되면 믿고 가요. 겐또(영어 ‘guess·생각하다’의 일본어) 때리고 그러진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 나라에 대해 느끼는 회의 같은 게 있었죠. 외국인 여권 들고선 한국의 모든 제도가 불편했었어요. 작품에서 목숨 걸고 젊음을 불살라도 내 것으로 안 됐어요. 좌절 속에서 ‘때려 치우고, 고국으로 돌아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땐 미국이 고국이었죠. 그런 찰나 박 대표 전화를 받았어요.

●그래도 뭔가 끌려야 ‘짝짜꿍’도 맞죠.

명성: 칼린 감독이 뮤지컬 ‘더 라이프’를 제가 만든 줄 알고 있었대요. 98년에 국내 최초로 정식 라이선스를 받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들여온 작품이죠. 저작권 공연문화 시발점이 됐습니다. 뭔가 도전적인 게 칼린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나 생각해요.

칼린: 맞아요. 남들 다 하는 거 하면 뭐 하나. 당시 흑인 배우들이 없었는데, 한국에서 ‘더 라이프’를 어떻게 공연했나 궁금증이 컸죠. 분장은 어떻게 하며, 리듬앤드블루스(R&B)는 또 어떻게 부를까 하고요.

●하모니가 흔들릴 땐 어떻게 풉니까.

칼린: 흠, 특별하게 부딪친 적은 없어요.

명성: 기분 나쁘거나 언짢은 적도 별로···.

●둘 다 성격이 센 편이죠? 그런데도 궁합을 유지하는 비결이 뭡니까.

칼린:‘내버려 둠’의 미학이 작동해요. 특이하죠? 짝꿍이라고 하면 보통 시시콜콜 조언해주고, 끼어들고 그렇게 생각들 하죠. 물론 싸우기도 하지만 언성은 안 높여요.

명성: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지향점은 둘이 같죠. 대신 각자의 영역은 한껏 존중합니다. 거기서 ‘척척 호흡’이 나와요.

●돌발 질문입니다. 각자의 장점을 평가하면요.

칼린: 박 대표는 한마디로 ‘뎀비는’ 성격이죠. 새로운 뮤지컬을 들여오고 실험하고. 저한테도 김영하 소설가의 『퀴즈쇼』 책을 던져 주곤 뮤지컬로 만들라고. 나쁘게 얘기하면 ‘무데뽀(‘막무가내’의 일본어 표현)’고요. 그런 도전은 사실 ‘동전의 양면’ 같아요. 잘 안 될 수도 있는. 아랫사람들은 ‘아이쿠 머리야’ 이래요. 하지만 박 대표는 거기서 밸런스를 잘 맞춰온 거죠.

명성: 박 감독에겐 3가지가 있죠. 먼저 우리는 돈 받고 표를 파는, 그래서 진정한 프로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다짐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죠. 둘째는 배우가 한번도 몸속에서 꺼내지 못한 소릴 끄집어내는 재주를 가졌어요. 그냥 되는 건 아니죠. 많은 대화를 통해 장단점을 파악해야 가능합니다. 셋째 연출 쪽으로도 창의성이 있어요. 요즘 연출로 방향을 바꿔 보라고 제가 얘길 많이 해요.

칼린: 그러니 무데뽀라고 하죠, 하하.

명성: 참, 칼린 감독은 ‘감동이 있는 여자’예요. 원래 조그만 것에 감동하고, 울고 그래요. ‘남자의 자격’에서 본 것과는 다르죠?

●서로의 단점도 말할 수 있습니까.

명성: 성격이 굉장히 급해요. 사실 둘 다 ‘다혈질’이죠. 저는 사람에게 막 쏟아부어요. 하지만 박 감독은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화 나도 꾹 참죠. 대단해요. 저도 거기서 배워요. 참, 또 하나. 아직까지 시집을 못 가는 게 큰 단점이죠, 하하. 그 인물과 그 능력에.

칼린: 와하하하하.

명성: 칼린 감독은 작품을 만들 때 굉장히 ‘드라이’해요. 단점이죠. 정(情)도 많고 눈물도 많은데 정작 뮤지컬은 깨끗함을 추구합니다. ‘아이다’도 사실 신파조로 눈물 나는 신(scene)과 대사를 넣어서 만들기가 쉬운데 그렇게 안 했죠.

칼린: 그게요, 어린 시절 첼로 배우고 연주도 했죠. 그때부터 ‘잡소리’를 싫어했어요. 뭔가 순수한 것에서 오버(over)가 되는 걸 꺼려요. 아동 때 스승들로부터 그렇게 배웠어요.

●자기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합니까.

명성: 흔히 ‘선택과 집중’을 말하잖아요. 저는 역으로 말해요. 그것만으론 지금 같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요. 저희도 밥 먹고 살려면 ‘맘마미아’나 ‘시카고’ 같은 대박 콘텐트만 여러 번 올리면 됩니다. 그러나 늘 새로운 것에 손대지 않으면 결국 고사(枯死)해요. 한 업계, 한 분야의 대표적 존재감을 뿜으려면 새걸 갖고 있어야 해요. 쉽게 가면 안돼요. 저는 작품 하나 만들 때마다 ‘최대 한계치’를 조금씩 늘려갑니다.

칼린: 저는 숙제가 없으면 작품을 안 해요. 얻는 게 있어야죠. 거창한 것, 작은 것 모두를 망라해서요. 예컨대 못된 연주자가 있다고 가정해봐요. ‘성격 나쁜데, 내가 쟤를 죽여보겠다’ 이렇게 마음먹으면 연습실에 더 자주 가게 돼요. 자연스레 작품에 몸을 바치는 결과가 되는 거죠.

●‘타인의 존재감’을 일깨워주는 박칼린표 노하우는 뭡니까.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 잠재력을 극대화했던 것처럼요.

칼린: 딱 보여요. 그냥.

명성: 한마디로 신기(神氣)가 있는, 무서운 여자죠. 사람을 딱 집어내는.

칼린: 운전하는 거 보면 성격 파악이 되죠? 노래도 같아요. 배우들이 제 레슨을 받으면 ‘심리 상담’을 받았다고 해요. ‘너 오냐 오냐 컸지?’ 다그치면 감정에 북받쳐서 5초 만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요. 선생 말을 어떻게 받아 먹는지, 뭐 시켰을 때 어찌 반응하는지 보면 사람을 알 수 있죠. 제가 잘 쓰는 말이 ‘돌대가리’예요. 노래도 똑똑해야 잘해요. 연기도 마찬가지고요.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안 하고 그러면 그걸 꺼내줘야 되죠. 저는 사람 쓰는 일이 사랑이라고 봐요. ‘캐스팅도 사랑’이죠. 결국 ‘진흙 속에서 진주(diamonds in the rough)를 찾는 일’이잖아요. 물론 저도 인간이라 틀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남자의 자격’ 출연진도 그렇고, 버리려 했던 모 배우도 그렇고 지금까진 잘됐죠.

명성: 왜 신기 있다고 한지 아세요? 안 되는 애들은 가차없이 잘라요. 훈육도 예쁘니까 하는 거죠.

박칼린 감독이 뮤지컬 연주자들과 연습하는 모습.

●뮤지컬 불모지에서 ‘탄탄대로’만 있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명성: 100억원 넘는 작품을 만든다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늘 불면증에 시달리죠. 2007년 차범석 선생의 희곡 『산불』을 뮤지컬 ‘댄싱 섀도우’로 만든 적이 있죠. 7년간 50억원을 투입했어요. 근데 25억원 손해를 봤죠. 쫄딱 망할 판이었어요. 제가 서울연극협회장 할 때인데 이사회가 열렸어요. 처음으로 이사들이 100% 참석했죠. ‘신시 점방이 문 닫는다’는 소문을 확인하려고요. 제 아파트도 내놨고 하늘이 캄캄하긴 했어요. 하지만 전 말했죠. 걱정 말라고요.

칼린: 그러고도 계속 일 저지르고 그랬잖아요, 하하. 저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외딴 곳’에 나와 혼자 지쳐간다는 느낌이 많았어요. 제가 유관순 누나도 아닌데 홀로 개척지에 나와 있다는 그런.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명성: 고마운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게 큰 힘이 됐죠. 연극인 김성녀 선생이 ‘개런티 못 받겠다’며 반납한다고 할 때 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새로운 시작을 생각할 힘이 났죠. 죽으라는 법은 없어요. ‘댄싱 섀도우’ 끝난 뒤 세종문화회관 공연장이 2주간 비었어요. 칼린 감독과 서로의 눈을 쳐다 봤죠. 그래 ‘시카고’를 올리자. 36억원을 벌었어요.

칼린: 어머니와 스승들의 말을 떠올리며 다잡았죠. 그 얘기는 문장 하나로 요약돼요. 바로 ‘퀄리티’(quality)예요. 그걸로 먹고살았어요. 작품 퀄리티를 높이자, 이거에만 집중하고 매달렸죠. 오디션도 그런 정신으로 했고요.

●사실 뭐든지 ‘혼자’ 이루는 건 없죠. 조력자와 멘토가 있게 마련인데요.

칼린: 저는 스승들에게 배운 걸 똑같이 물려주려 해요. 도제(徒弟)식으로 가르치죠. 지금 애들은 레슨비 탁 내고 가려고 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 ‘정신’은 못 배우죠. 쟁이의 혼 같은. 기술만 배운다고 예술이 되는 건 아니고, 삶과 도덕 이런 것도 흡수해야 돼요.

●올해엔 어떤 도전을 할 겁니까.

명성: 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연극 산불을 올릴 계획입니다. 1500석에서 하는 대극장 연극이 사라진 지 오래죠. 또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로 임용됐는데, 사실 칼린 감독이 부러웠거든요. 가만히 있어도 교수(전북 호원대 방송연예학부)로 오라고 하는. 기성세대가 20대를 과소평가하는데, 그들만의 독창성을 한껏 키워주고 싶어요.

배우 → 연출자 → 기획자
첼로 → 판소리 → 음악감독
도전 거듭한 뮤지컬 콤비

#1. 3전4기의 남자

1979년 전남 해남의 산골 소년은 연극에 푹 빠졌다. 입장료 1500원 시절. 열일곱 까까머리 청춘은 푼돈이 모이면 늘 극장 행이었다. 어느 날 가슴에 불을 지른 작품이 나왔다. 차범석의 ‘산불’이었다. 희망이 생겼다. ‘커서 배우가 되겠다’. 박명성 대표의 무대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고교를 나와 연극판에 입문했다. “지금도 어렵지만, 그때야말로 연극계의 보릿고개 끝물이었어요, 힘들었죠.”

 무대의 벽은 높았다. 배우로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배우 김갑수씨가 ‘연극계 거물’인 극단 신시(神市)의 김상열 선생 밑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다시 찾아온 기회였다. 두 번째 도전, 연출로 방향을 틀었다. 일을 배워 89년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힘에 부쳤다. 선생도 호통쳤다. “배우는 텄다 싶어 연출 시켰더니 이것도 젬병이네.”

결국 연극 기획자로 다시 변신했다. 포스터 붙이고, 전단지 돌리는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 롯데예술극장이 문을 닫았다. 네 번째 도전 기회가 왔다. 뮤지컬 인맥이 신시로 몰렸다. 박 대표도 ‘뮤지컬 프로듀서’로 나섰다. 물을 만났다. 바닥부터 맛본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이 힘이 됐다. 본토 뮤지컬을 정식으로 돈 주고 수입해오면서 ‘브로드웨이 박’이란 별명도 생겼다. 99년 신시의 대표가 되고, 박칼린 감독과 ‘시카고’로 인연을 맺으며 더욱 탄탄한 성공 신화를 열어갔다.

 #2. “모든 나라가 너희들 나라지”

70년대 중반 부산의 골목. 아이들이 이국적 모습의 소녀들을 놀리고 있었다. 여덟 살 꼬마 박칼린과 그의 언니였다. 아빠에게 울먹이며 다가갔다. “얘들아, 한국도 네 나라고, 미국도 네 나라야. 아니 모든 나라가 너희들 나라지.” 아빠도 따라 울었다.

 박칼린의 삶은 태생부터 ‘정체성’과 엮여 있었다.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가 뉴욕의 한 대학에서 부른 ‘아리랑’ 노래에 아버지가 흠뻑 빠져 그녀의 운명도 시작됐다. 양쪽 문화를 익히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일상도 이어졌다. 반쪽의 조국, 한국은 가까운 나라만은 아니었다. 서울대 국악 대학원 시절, 스승 박동진 명창은 그녀를 “한국말을 잘도 하는 양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박 감독은 그런 운명이 되레 힘이 됐다고 한다. “제가 가진 건 사실 그것밖에 없어요. 바로 ‘다양성’에서 나오는 힘이죠.” 그녀는 “제게 어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수많은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정신을 길러줬다”고 했다.

“사실 저는 인종을 떠나 뭐든지 실력 위주로 평가하고 살아왔어요. 오로지 ‘퀄리티’(quality)예요.” 93년 뮤지컬 ‘명성황후’를 만들며 업계 어른들에게 “뭐 그런 걸 하느냐”고 욕먹으면서도 처음으로 오디션 제도를 도입한 것도 그런 정신, 배짱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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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하면서 창작 영감 얻습니다”

예술가들은 영감으로 먹고산다.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감(感)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고, 기발한 무대를 떠올리고, 노래의 맛을 살려내는 편곡과 지휘가 생명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일상’과 ‘주변’에서 나올 때가 많다. 박칼린 감독은 ‘수세조기시(手洗操器時) 창작영감다득(創作靈感多得)’이라는 묘한 좌우명 같은 게 있다. ‘손으로 그릇을 씻을 때 영감이 쏟아진다’는 자작 문구다.

●번뜩이는 영감을 언제 얻나요.

 “설거지할 때요. 원래 제가 손이 되게 차요. 찬 걸 굉장히 싫어해요. 설거지할 때는 따뜻한 물로 하잖아요. 그래야 기름기 같은 게 없어진다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고요.”

●설거지와 영감이 무슨 관계인지….

 “영화 보면 미국에선 부엌 싱크대 앞에 작은 창문이 있죠. 거기로 앞마당 정원이 보이고요. 설거지할 때 손은 따뜻하고, 더러운 걸 씻어내는 작업을 하는 데다, 바깥으론 꽃이며 나비가 보여요. 편안한 마음에 반짝 아이디어가 나와요. 단순 노동을 할 때 머리가 여유가 생긴다고 할까요.”

 박명성 대표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12년을 동고동락했는데 그 얘긴 나도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칼린 감독이 설거지뿐 아니라 집안일에 특기가 많다고 했다. “빵을 잘 굽죠. 제작진에 나눠주곤 해요. 그게 박 감독 낙(樂) 중 하난데.” 그녀의 손맛이 아쉬운지 박 대표가 슬쩍 약을 올렸다. “요즘은 바빠서 그것도 못하는 것 같아요. 반성을 좀 해야지, 하하.”



박칼린 ▶1967년 미국 LA 출생 ▶칼린은 ‘아일랜드 소녀’란 뜻 ▶부산 초량초 재학 중 도미, 귀국 후 경남여고 재학 ▶캘리포니아예술대학(첼로 전공) ▶서울대 대학원 국악작곡과(명창 박동진 사사)·뮤지컬 ‘퀴즈쇼’ 등 연출

박명성 ▶1962년 전남 해남 출생 ▶서울예술대 무용과, 단국대 연극영화과 ▶단국대 대중예술대학원 ▶82년 배우로 연극계 입문, 고(故) 김상열 선생의 ‘신시’ 극단에서 연출 ▶99년 신시 대표 맡은 뒤 대형 뮤지컬 기획 ▶2011년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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