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포스트 이창호 누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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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4월 열리는 후지쓰배에 한국 선수는 7명이 출전한다. 이세돌·최철한·이영구·허영호·김지석·박정환·강유택이 그들인데 이 명단에 ‘이창호’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자동 출전했던 이창호 9단이 ‘시드’를 잃고 선발전에 나섰으나 탈락의 고배를 마신 탓이다. 천하를 한 손에 움켜쥐었던 절대 강자 이창호가 빠진 바둑 판도가 안개에 덮여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돈은 갈수록 심해질 전망이다. 강자들은 있다. 그러나 절대 강자는 없다. 새로운 강자들도 속속 기치를 세우고 도전에 나서고 있다. 천하 대권은 언제쯤 누구의 손에 돌아갈 것인가.

22년 만에 무관이 된 이창호 9단이 후지쓰배 대표에서 탈락했다. 1994년 이후 17년 만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바둑 천하는 중국의 쿵제 9단과 한국의 이세돌 9단이 양분한 것으로 보였다. 2009년엔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의 양강(兩强) 체제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원하게 앞서 나가지 못한 채 부침을 거듭했고 지난달 열린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컵은 중국의 조선족 박문요 5단에게 넘어갔다.

23세의 박문요는 강한 신예지만 대권을 쥘 수 있는 자가 보여주는 ‘광채’의 측면에선 이세돌-쿵제-구리 등과 비교할 수 없었다. 중국 랭킹도 12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박문요는 쿵제를 2 대 0으로 완파했다. 2010년 세계 4관왕으로 “그의 바둑은 약점이 없다”는 찬사를 들었던 쿵제는 왜 1년도 못 가 힘을 잃은 것일까. 구리는 왜 롤러코스터 같은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며 일인자 후보 중 가장 천재적인 광채를 보여온 이세돌은 저 비어 있는 왕좌 자리를 단숨에 거머쥐지 못하는 것일까.

 비밀은 이창호란 인물에서 찾아야 한다. 35세의 이창호는 20세 무렵부터 10년 이상 대권을 거머쥔 채 이세돌(28), 구리(28), 쿵제(29)의 진격을 견제했다. 말하자면 이창호로 인해 이들은 대권을 거머쥘 최고의 전성기를 놓쳤다고 볼 수도 있다(적어도 쿵제의 경우 이번 LG배 결승에서 노쇠의 징후를 드러냈다).

 그 사이 한국에선 최철한·박영훈·원성진·강동윤·김지석·박정환·허영호 등이, 중국에선 셰허·저우루이양·천야오예·리저·퉈자시·장웨이제·구링이·박문요·스웨 등이 나타났다. 이세돌·쿵제·구리에게도 저 무수한 신흥 맹주들은 버겁고 피곤한 상대들이다. 한두 번은 몰라도 세 번 연속 이기기는 힘들다. 그 결과 세계 5대 기전은 최철한(응씨배), 구리(삼성화재배), 이세돌(BC카드배), 박문요(LG배), 쿵제(후지쓰배)가 분할 점령하고 있다. 국내 기전도 상금 순으로 박영훈(하이원배 명인전), 이세돌(KT배), 원성진(GS칼텍스배), 박정환(원익배 10단전), 최철한(국수전) 등 우승자가 저마다 다르다.

 중국은 군웅할거 현상이 더 심하다. 상금 순으로 란커배(셰허), 창기배(퉈자시), NEC배(구리), 아함동산배(추쥔), 이광배(쿵제), 명인전(장웨이지에), 천원전(천야오예) 등 7대 기전의 얼굴이 제각각이다. 이 모든 게 지금의 세계바둑이 완벽한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말해준다.

천하 대권의 임자는 누구도 점칠 수 없다. ‘3강’중에선 천재 이세돌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만 그에게도 시간은 별로 없고 뒤쫓는 세력은 너무 많다. 한국에선 신흥 세력 중 최연소 타이틀 보유자인 박정환을 가장 유력 후보로 꼽는다. 성적은 아직 미달이지만 그가 18세 불과해 시간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환의 앞길은 첩첩 산중이다. 우선은 중국의 비슷한 또래의 강자들, 즉 20세의 구링이, 장웨이제, 저우루이양, 스웨 등부터 제압해야 한다.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지금, 이창호 급의 절대 강자가 출현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박치문 전문기자

◆세계바둑대회=1988년 시작된 세계대회의 역사는 이창호의 역사와 많이 겹친다. 첫 대회는 88년 후지쓰배와 응씨배. 97년 삼성화재배와 LG배가 생겼고 3년 된 BC카드배가 5대 기전의 막내다. 이창호는 춘란배와 TV아시아선수권을 포함해 23회 우승했다. 2위는 이세돌의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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