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옛문화'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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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길(안국동 로터리~탑골공원 입구)이 옛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골동품점.화랑.필방.표구점 등 아기자기한 공간이 허물어지고 인터넷카페.피자집 등 '청담동류'의 최신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 '원형파괴' 〓2일 오전 인사동길. 관훈동 188번지에는 '21세기 인사동의 새명소' 를 표방하는 지상6층.지하3층의 건물이 신축 중이다. 여타 건물들이 높아야 3층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셈이다. 여기있던 도예점.화랑은 사라지고 카페.바.공연장을 갖춘 복합건물로 탈바꿈된다.

그 맞은 편 관훈동 50번지 일대. 한옥 영빈가든(한식집) 을 포함한 4백50평에 들어선 표구점.화랑.도예점 등 가게 12곳의 임대 상인들은 요즘 몹시 불안하다. 모 건설업체가 1백10억원에 이 주변을 모조리 사들여 곧 건물을 비워야 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동서표구화랑 나정수(羅正洙) 씨는 "인사동길의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이곳에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옛모습은 흔적없이 사라질 것" 이라고 걱정했다.

서울 종로구에 따르면 97년 이후 지난달말까지 인사동길 주변에는 모두 12건의 건축허가가 이뤄져 현재도 곳곳에서 공사중이다.

문제는 고유업종은 대부분 퇴출되고 인터넷 카페.술집등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 안국동 로터리~인사동 네거리가 '현재진행형' 으로 파괴 중이라면 인사동네거리~탑골공원 입구는 이미 옛 모습을 상당부분 잃어버렸다.

15층짜리 대형 업무빌딩이 인사동길 입구를 짓누르고 섰는가 하면 게임장.편의점.술 등이 점령해 이미 평범한 유흥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 손 놓은 당국〓'이 사태에 대해 도시연대 최정한(崔廷漢) 사무총장은 "개발논리와 당국의 무대책의 합작품" 이라고 지적한다.

97년부터 차없는 거리가 조성돼 주말에 내방객이 넘쳐나자 지주들의 개발욕구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영국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데 따라 거대 상업자본이 인사동길에 들어오게 한 기폭제가 됐다고 한다.

원형파괴가 가속화하고 있어도 서울시와 종로구는 "주민(토지주) 반발이 거세다" 는 이유로 적극적인 억제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당국의 보존의지를 의심케하는 대목은 89년에 도시설계 예정지구로 지정해 놓고 10년이 지나도록 정식 지구지정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건축물의 외형.높이.용도를 제한할 수 있는 도시설계지구를 속히 지정하고 동시에 지방세 감면 등의 혜택을 줄 수 있는 문화지구로 지정해야 한다" 고 지적하고 있다.

◇ 시민이 나섰다〓도시연대와 영빈가든 일대 12곳의 전통가게 임대상인들이 주축이 돼 지난달 초부터 '작은 가게 살리기 10만인 서명운동' 이 한창이다. 한달만에 1만5천여명이 서명했다.

도시연대 최정한 사무총장은 "도시설계지구와 문화지구 지정이 이뤄지기 전이라도 건축행위를 당분간 제한해야 한다" 며 "동시에 전통 가게의 경쟁력을 확보해주는 특단의 지원책도 마련해야 한다" 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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