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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77)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단식, 개안수련 1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햇빛은 나날이 따뜻해졌고 숲은 하루가 다르게 신신해졌다. 새순이 나지 않았는데도 나무들은 어딘지 모르게 세수하고 난 아이들처럼 꿋꿋하고 해맑아 보였다. 귀를 대면 힘차게 수액을 빨아올리는 나무들의 펌프질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월부터 단식원에 새 식구들이 들어왔다.

단식을 실제로 이끌고 지도하는 일은 주로 백주사의 몫이었다. 퇴마를 겸한 단식과정이었다. 사악한 기운이 체내에 끼어들면 죽을병에 걸린다고 했다. 암에 걸렸다가 병원에서 포기하다시피 한 사람, 병명을 뚜렷이 밝혀 알지 못한 사람, 간이나 심장질환으로 수술을 앞두었거나 수술 후 재발돼 죽음으로 밀려가는 사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악한 기운이란 카르마에 따른 나쁜 영(靈)의 덧씌우기 같은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니, 단식을 통해 육신을 뿌리부터 쉬게 하면 나쁜 영도 기력을 잃어 떠날 뿐 아니라, 마침내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백주사는 영혼의 촉광이 높아지면 덧씌운 나쁜 영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질병이란 빙의령(憑依靈)에 의해 경혈이 막혀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단언했다.

이사장의 설법은 백주사와 조금 달랐다.
그는 빙의령을 단호히 부정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백주사처럼 빙의령의 실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가족, 한때의 욕망으로 자신이 모해(謀害)한 친구나 친지의 모습, 언젠가 매몰차게 뿌리친 적이 있었던 사람의 혼백이 나타나더라도, “두려워 말고, 보라!”라고 이사장은 일갈했다. 백주사가 사람들을 두려움의 구덩이로 내몰면, 이사장이 설법을 통해 각자의 죄를 물어 자책하도록 한 다음, 의식의 내적개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식이었다. 오랫동안 역할을 짜 맞춘 훌륭한 복식조(複式組)라 할 만했다.

“혼백이란 당신들이 만든 그림자요!.”
이사장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눈을 맞췄다.
“당신들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허깨비라 그 말입니다. 죄가 없다면, 이 방에서 당장 나가는 게 좋아요! 죄 없는 생존이 과연 있는가. 세상의 피해자라고 생각해 세상을 원망하는 분도 있겠지만, 틀렸오! 여러분은 한때의 욕망에 좇아 누군가에게 죄를 지으며 살아온 가해자요! 여러분에게 붙은 어떤 혼백이든, 따져보면 자신의 잠재적인 죄의식이 만들어낸 허깨비라는 걸 똑바로 봐야 눈이 열릴 것이오! 이번 개안(開眼)수련을 통해 다 내려놓으세요. 욕망이 불러온 죄의 씨앗을 다 뿌리 뽑아 없애지 않고선 청정의 기운을 회복할 수 없어. 바로 당신들 마음속에 아수라가 있다, 그거요! 몸이 아픈 것 또한 모두 내가, 내 욕망이 불러들인 결과라는 걸 왜 모르시오!”

그쯤에서, 가슴을 치며 우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눈을 여는 첫 번째 단계라면서, 단식을 가리켜 이곳에선 ‘개안수련’이라 불렀다. 개안수련 이틀째던가, 한번은 이사장이 설법하는데 한 여자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이사장을 향해 달려 나온 적이 있었다. 부자였던 남편을 잃고 남편의 형제들에게 의지했다가 그들에게 재산의 반을 빼앗긴 끝에 심장질환을 얻어 단식원에 들어온 여자였다. “이사장님, 제 어깨 위에 피투성이 된…… 웬 남자가 있어요!” 공포에 질린 여자가 소리쳤다.

“그게 누구요!” 이사장이 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모르는 남자예요.” 여자는 제정신을 거의 놓은 상태였다. “그럴 리가 없오! 그게 누군지 똑바로 보시오. 똑바로 보지 않으면 그에게 지는 것이오!” “잘 모…… 모르는….” “모른다고 하고 싶은 게지. 당신이 아는 남자야! 눈을 뜨고 봐! 봐야 돼! 그게 누구야!” 이사장이 여자의 떨리는 손목을 잡고 얼굴을 바투 들이대며 소리쳤다. 이사장의 눈에선 불(火)이 나왔고, 여자의 눈에선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오우, 형…… 형진 씨…….”

마침내 여자는 비명처럼 부르짖고 나서, 곧 혼절했다. 형진이라는 남자가 여자의 예전 애인이었다는 말은 다음 날 들었다. 여자는 형진이라는 남자에게 첫정을 주었으나 집안이 좋고 돈도 많은 남편을 만나 첫정을 준 그 남자를 끝내 매몰차게 버렸던가 보았다. 병약했던 여자의 남자는 실연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날마다 술에 취해 지내다가 어느 날 여자를 찾아오던 중 뺑소니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여자의 심장질환은 여자에게 붙어 있는 죄의식이 빙의(憑依)과정을 거쳐 생겨났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사장은 여자의 단식과정을 특별히 새로 만들었다. 맞춤식 개안수련이었다. 단식과정이 모두 끝난 다음에도 여자는 ‘패밀리’가 되어 계속 명안진사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나는 예감했다. “의식 속에 또아리 튼 죄업을 풀지 않으면 그 의식의 분열이 경혈과 경락을 막아 어떤 약을 먹어도 심장은 종말을 향해 내달릴 것이오!” 이사장의 확신에 찬 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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