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싸고 오래 써 … 골프 대중화 시대 연 19세기 발명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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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호 14면

19세기 후반에 사용된 거타 퍼차.

‘The filth’(쓰레기, 도덕적 타락).
1840년대 말 스코틀랜드 명문 골프클럽 세인트 앤드루스의 최고 프로골퍼 앨런 로버트슨은 새로 나온 골프 볼을 이렇게 불렀다.

성호준의 골프 진품명품 <1> 최초의 고무공 거타 퍼차(gutta-percha)

이 공이 거타 퍼차(gutta-percha:고무의 일종)다. 에든버러에 살던 골프광이자 목사인 제임스 패터슨이 발명했다. 그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상자 속에 들어 있던 이상한 물건으로 만든 것이다. 선물이 깨지지 않게 하려고 함께 넣어둔 고무였는데 끓는 물에 넣으면 부드러워져 구형(球形)으로 만들 수 있었다. 요즘 거의 모든 구기의 볼은 고무로 만든다. 고무공의 시조는 골프다. 이 거타 퍼차가 서서히 대중화되고 있었다.

무적의 프로골퍼 로버트슨은 거타 퍼차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쓰레기로 하는 것은 골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아이들에게 몇푼을 주고 코스에 잃어버린 ‘쓰레기’를 주워오게 해 태워버렸다. 그가 이 볼을 증오한 것은 그가 이전까지 쓰던 골프 공 ‘페더리(feathery)’의 제작자로 큰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버트슨이 쓰레기라고 생각한 거타 퍼차의 의미는 매우 크다. 싸고 재활용도 가능한 거타 퍼차가 나오면서 일반인들도 골프를 할 수 있게 됐다. 귀족의 놀이였던 골프는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다.

공이 바뀌면서 클럽도 변했다. 페더리 시대의 주요 클럽은 롱 노즈(long nose) 우드다. 헤드가 길쭉해 이렇게 불렀다. 거타 퍼차를 롱 노즈 우드로 치면 헤드 페이스가 부러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헤드가 뭉뚝한 우드가 나오게 됐다.

거타 퍼차는 런이 많았다. 그린에서 런은 좋지 않다. 골퍼들은 그린에 세우기 위해서는 스핀을 걸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언으로 찍어 치는 게 좋다는 걸 알아냈다. 페더리 시절에도 아이언이 있기는 했지만 공이 찢어질 위험이 컸기 때문에 트러블 샷에서만 썼다. 거타 퍼차에 가장 크게 저항했던 로버트슨이 역설적이게도 아이언 사용의 틀을 만들었다. 그는 일단 페더리를 포기하자 거타 퍼차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인물이다.

거타 퍼차는 스윙도 바꿨다. 페더리는 약하고 탄성이 작아 부드럽게 쓸어 쳐야 했다. 거타 퍼차는 내구성이 강해 찍어 쳐도 상관이 없었다. 찍어 치려면 이전의 플랫 스윙으로는 불가능했다. 스윙 궤도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골프대회가 생긴 것도 거타 퍼차와 관련이 있다. 로버트슨은 도제들에게 절대 쓰레기로 골프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 톰 모리스는 라운드 중 공을 다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동반자가 가지고 있던 거타 퍼차를 써야 했다. 모리스는 거타 퍼차가 박음질 자국이 없고 약간 더 무거워서 퍼트하기에 훨씬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거타 퍼차를 쓴 사실이 들통나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쫓겨났다.

그는 프레스트윅의 새로 생긴 골프장에 스카우트돼 갔다. 신설 골프장인 프레스트윅은 소속 프로인 톰 모리스를 자랑하기 위해 1860년 골프대회를 열었다. 디 오픈 챔피언십의 시작이다. 거타 퍼차가 나오지 않았다면 톰 모리스는 디 오픈 네 차례 우승은커녕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거위털을 소가죽에 우겨 넣는 일(페더리 제작)을 하다 생을 마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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