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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끌려다니는 협상 계속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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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안세영
서강대 교수·국제지역연구소장

지금까지 공산주의자와 협상해서 이긴 사람은 딱 둘,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 총리와 미국 레이건 대통령뿐이다. 리콴유 총리는 공산당과 협상해 손을 잡고 집권한 뒤 매정하게 그들을 권력에서 제거했다. 1987년 아이슬란드 미·소 정상회담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막강한 힘의 외교를 바탕으로 고르바초프를 압박해 냉전 해소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 둘 외에는 세계사에서 공산주의자와 협상테이블에 앉아 본전 찾은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지연 전략으로 병약한 루스벨트를 괴롭혀 한반도에 38선을 긋는 성과를 얻어냈다. 연안으로 쫓겨간 공산당을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장제스(蔣介石)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노련한 책략에 말려들어 국공합작 협상을 하고 결국 천하를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내주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2000년 대통령이 평양까지 가 정상회담을 하고 마치 한반도의 전운(戰雲)이 사라진 듯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평화는커녕 얻은 것은 북핵 위협뿐이다.

 얼마 전 남북 군사실무협상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서해안에서 한동안 어뢰와 대포로 분탕질을 치더니 군사협상을 하자고 먼저 제의해 놓고는 일방적으로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갔다. 물론 그 다음 평양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남조선 역적패당’이라는 거의 쌍소리뿐이다. 이에 대한 우리 반응은 ‘대화의 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언제든 마음 바뀌면 협상테이블로 나오라’는 식이다.

 이는 북을 아주 잘못 다루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그들의 벼랑끝전술, 치고 빠지기 같은 지저분한 기만적 술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만 왔다. 우리 대표와 마주 앉은 이선권 대좌에게 협상은 총을 들지 않은 전쟁이다. 천안함을 어뢰로, 연평도를 대포로 공격했다면 남과의 협상에서는 혓바닥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다. 상호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 발 물러설 줄도 아는 우리와 달리 그에게 협상에서의 양보란 전쟁에서의 후퇴를 의미한다.

 하버드 대학의 라이파, 피셔 교수 등이 북한과 같이 ‘비도덕적인 짓거리만 일삼는 협상상대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비도덕적 술책만 일삼는 상대에 끌려다니며 도덕적으로만 협상하면 예외 없이 손해를 본다’ ‘따라서 그런 유의 상대와는 협상 자체를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차선책으로 협상을 하려면 상대와 똑같은 협상전술로 거칠게 맞대응하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대북 협상전략을 180도 전환해야 한다. 북한 같은 상대와는 때론 협상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협상이다. 북은 군사회담 퇴장 이틀 만에 여야 4당에 “대화하자”고 서한을 보내 왔다. 북이 못된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설사 미국·중국이 등을 떠밀더라도 절대 협상을 재개해선 안 된다.

 하지만 북한이 변화해 진정성을 보이고 진심으로 대화를 원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식량지원, 금강산관광 재개 같은 경제적 지원에 대한 꼬였던 실타래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이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해 한반도에 훈풍이 부는 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안세영 서강대 교수·국제지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