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허남진 칼럼

김일성의 마지막 훈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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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허남진
정치분야 대기자

김정일 차남 김정철(30)의 싱가포르 호화 외유 행각이야말로 부조화의 극치다.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억압적이며 반(反)서구적인 나라의 최고지도자 아들이 서방의 신세대 차림으로 값비싼 사치품을 구입한다. 서방의 대표적 대중음악가 에릭 클랩턴의 공연도 관람하며 즐거워한다. 장남 김정남(40)의 친(親)서방적 풍모에 이은 두 번째 파격이다. 배고픔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북한 주민과 자본주의 사회의 재벌 2세처럼 행동하는 두 아들의 행태. 이 기막힌 이율배반의 드라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김정남·정철 두 형제의 일탈은 또 다른 측면에서 김정일 후계구도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최소한 형제의 난은 없을 것 같다. 3남 김정은이 2·16 김정일 칠순 생일을 계기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임명됐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그건 실질적인 권력 장악을 의미한다. 머잖아 2400만 북한 주민의 운명은 스물일곱 살 청년의 손에 맡겨지게 될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할아버지 김일성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으로 깜짝 등장했다. 통통하고 건장한 외모까지 젊은 시절 김일성을 쏙 빼닮았다. 김정은이 할아버지 모습을 똑같이 연출하는 의도는 뻔하다. 북한 주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할아버지의 카리스마를 이입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도 김정은은 할아버지가 짜 놓은 틀을 크게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김정일 또한 ‘김일성 틀’을 철두철미 지키고 답습했다. 문제는 그 김일성 방식이 핑핑 돌아가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먹혀들겠느냐는 의구심이다.

 김일성의 말년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광경들을 만날 수 있다. 1994년 7월 6일 김일성은 ‘경제부문 책임일꾼’들을 불러모아 일장 훈시를 했다. 사망 이틀 전이다. “화학비료가 없어 벼와 강냉이에 이삭비료를 주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삭이 제대로 안 나와 잘 여물지 못한다”고 운을 뗀 뒤 “농사를 잘 지어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풀어야 하며 그러자면 화학비료를 많이 생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체적 수치까지 열거하며 산업 전반으로 이어지는 그의 훈시 속엔 배배 뒤틀린 북한 경제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료를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기가 모자라고 공장설비 보수를 잘 하지 못해서다… 전기가 모자라는 것은 양질의 석탄 생산에 차질을 빚어서다… 석탄을 많이 생산하지 못하는 데는 탄광들에 강재를 제대로 대주지 못해서다… 강재 생산을 늘리자면 금속공장들을 잘 돌려야 한다. 금속공장들을 잘 돌리자면 콕스탄 문제를 풀어야 한다. 콕스탄은 여러 나라에서 사와야 한다….”

 이게 꼬이니 저게 안 되고, 저걸 풀자니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식이다. 총체적 파탄 지경의 경제 상황을 마주한 당시 김일성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는 훈시 내내 “열성이 부족하다” “과업을 게을리했다”며 부하들을 매섭게 질책하고 추궁하고 이런저런 지시도 하달한다. 그러나 지시와 대책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공허한 내용뿐이다 보니 행간에서 답답함과 좌절이 짙게 묻어난다. 김일성의 마지막 7·6훈시는 자신이 내세운 주체 경제의 실패 현황을 집대성한 결산서이자, 김일성 방식의 한계를 인정한 고백서로 읽힌다.

 훈시 중엔 그나마 눈길 끄는 대책이 하나 있다. “무역일꾼들을 다른 나라에 내보내 시야도 넓히고 장사 물계도 알게 해야 한다”는 지시 내용이다. 무역일꾼들이 세계적 ‘장사 물계’를 너무 모른다고 개탄한 뒤 나온 대책이다. 이어 그는 “나는 앞으로 어느 나라든지 우리나라와 경제합작 같은 걸 하자고 하면 하려고 한다”고도 말했다. ‘김일성 주체 경제’와는 어긋나는 내용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야겠다는 뒤늦은 깨달음의 일단이라고 해석된다. 내외의 심각한 도전으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직면한 당시 김일성으로선 개혁·개방의 물꼬 트기를 신중히 검토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김정은은 할아버지의 말년 고뇌를 이해하고 있을까. 할아버지의 겉모습만 흉내 낸다고 저절로 리더십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망 직전 참담했던 할아버지의 심경을 헤아리고 밖을 향한 뒤늦은 깨달음까지 천착해야 한다. 무엇보다 김일성이 짜 놓은 틀은 김일성 본인이 마지막 순간 허물고 떠났다는 기막힌 사연부터 깨치길 바란다.

 김정은은 형 정철과 함께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서 상당 기간 유학했다. 영어는 물론 독일어·프랑스어도 익혔다고 한다. 클랩턴의 광팬 정철과는 다를지 몰라도 작금의 국제사회 흐름은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서구 물을 먹은 경험을 토대로 글로벌 감각을 십분 활용해 나가길 기대해봄 직하지 않을까.

허남진 정치분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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