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홍콩 월세와 한국 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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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 용 환
홍콩 특파원

홍콩 섬 상업 중심지인 완차이의 스톤 눌라길 ‘블루하우스’. 1920년대 초 지어진 파란 페인트색 건물이다. 청나라 말기 무술가 황비홍의 수제자 람사이윙(林世永)의 가문에서 1층에 쿵후 도장을 열기도 했던 나름대로 유서 깊은 건물이다. 1998년 홍콩 정부가 도시 문화유산으로 리모델링하기 위해 매입했지만 일정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노후 건물이라서 허물어질 위험이 적잖지만 세입자들이 살고 있어 공사를 강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블루하우스 주변엔 슬럼화된 집들이 많지만 환경미화가 잘돼 뒷골목도 깨끗하다.

 시간당 최저 임금이 28홍콩달러(약 4000원)인 홍콩에서 최저 소득층에 속하는 서민들은 이런 슬럼화된 주택이나 방 두 칸짜리 50년 이상 된 낡은 아파트에서 월 임대료 5000~6000홍콩달러를 내고 산다. 매달 현찰을 내야 하는데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값싼 주거지를 찾아 변두리로 나가는 것도 높은 교통비를 감안하면 대안이 못 된다. 홍콩은 세계에서 주택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도시다. 홍콩의 서민층이 살인적인 월세(月貰) 속에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것은 사교육과 병원을 드나들면서 뭉칫돈이 안 나가기 때문이다. 홍콩의 부유층은 학생의 스펙 관리를 위해 해마다 두 차례씩 스위스·대만·호주 등지로 체험 여행을 떠나는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낸다. 일부 중산층도 출혈을 감수하며 이 대열에 낀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산층과 서민층은 철저한 학사관리와 경쟁 시스템을 통해 배양된 우수한 교사들을 믿고 공립학교에 자녀를 맡긴다.

 홍콩에선 웬만한 병치레로 정부병원에 3~4일 입원치료 받는 데 드는 비용보다 환자를 태우고 오가는 택시비가 더 나온다. 정부병원에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저렴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대기실은 늘 서민들로 붐빈다. 병원을 찾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고 2~3시간씩 기다리는 게 싫으면 비싼 보험에 가입해 사립병원을 찾으면 그만이다.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일대가 전세(傳貰) 대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집주인 입장에선 부동산 투자 전망이 시원찮고 은행 이자보다 월세 수입이 더 실속 있는데 굳이 전세를 놓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전세 물건이 자취를 감춰가고 전세를 낀 월세나 전액 월세가 새로운 임대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세는 목돈이 드는 부담은 있지만 돌려받는 돈인 반면 월세의 경우 매달 꼬박꼬박 현찰을 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서민들은 이런 전세시스템에 기대어 만만찮은 사교육 비용을 댈 수 있었다. 월세가 대세가 된다면 사교육 비용을 줄이거나 없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세난으로 촉발된 세입자들의 불만은 사회 불안을 잉태한다. 지금까지 전세제도는 이런 문제를 완충시켜줬던 범퍼였다. 홍콩 서민들은 살인적인 임대료를 내고 살지만 안정된 의료와 질 좋기로 정평 난 공교육의 뒷받침을 받는다. 우리의 정치권은 무상급식 등의 복지 논쟁만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대로 월세 시대가 오도록 손 놓고 볼 것인가.

정용환 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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