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퍼에게 正義란 무엇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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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호 14면

“자, 핸디 20개 줄게. 어서 받아.”
초보자 시절 A선배는 내게 큰 인심 쓰듯 말했다. 1번 홀 티샷을 앞두고 잔뜩 긴장해 있던 나에게 10만원을 건네며 한 말이었다.

정제원의 골프 비타민 <150·끝>

“지금부터 내기를 하는 거야. 타당 5000원이니까 핸디 20개면 10만원. 그런데 우리 세 명이 10만원씩 주니까 30만원이야.”

나는 ‘핸디 20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황송한 마음으로 돈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기가 시작됐다. 나는 그날 트리플보기와 양파(더블파)를 밥 먹듯이 했다. 핸디로 받은 돈이 손 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그런데 트리플보기 이상의 스코어를 기록하면 다음 홀이 배판(내기 액수가 2배)이 된다는 사실을 A선배는 말해주지 않았다. 트리플보기를 하면 돈을 뭉치로 잃는 것도 억울한데 다음 판에선 배판이란다. 그렇다면 타당 1만원이 되는 셈인데 이런 식으로 내기를 하다 보니 6번 홀을 넘기지 못하고 지갑이 텅 빌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핸디로 받은 30만원을 잃은 건 물론 지갑 속 30여만원을 고스란히 A선배 일행에게 갖다 바쳤다. 쉽게 말해서 6번 홀에서 ‘만세’를 부른 셈이었다. A선배는 입맛이 쓰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골프장에 나올 때는 말이야. 돈을 잔뜩 찾아오는 건 기본이야. 김○○ 알지. 걔는 골프장 올 때 최소한 100만원은 갖고 나온다고. 얼마나 훌륭한 매너야.”

나는 얼굴을 푹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A선배의 말이 좀 부당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타당 5000원짜리 스트로크 내기에서 ‘핸디캡 20개=10만원’이란 등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타당 5000원짜리라 해도 트리플보기 이상을 하면 다음 홀에선 내기 금액이 배로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타당 1만원짜리 판에서 내가 트리플보기를 하고, 상대방이 파를 했다면 3만원이 빠져나간다. 초보자가 상급자 3명과 내기를 한다면 한 홀에서 10만원 이상을 잃을 수가 있다. 이런 식의 내기는 엄밀히 말해서 불공정, 불평등 계약이다.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예를 빌리자면 초보자에게 내기 골프를 권유해서 돈을 따는 것은 혼자 사는 노파에게 배관공이 화장실 변기 수리의 대가로 5만 달러를 요구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행위다.

요즘 ‘신(新)라스베이거스’ 내기가 유행이다. 매 홀 4명의 플레이어가 제비를 뽑아 편을 가른 뒤 스코어를 합산하는 방식이다. 파를 해도 더블파를 기록한 사람과 편이 되면 돈을 잃을 수도 있다. 상급자들은 그래서 신라스베이거스는 불공정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초보자들은 이 게임을 선호한다. 스코어가 나빠도 돈을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역시 공정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이 방식이 인기를 끄는 걸 보면 한 사람의 독주보다는 공리주의를 선호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모양이다. 하긴 어수룩한 초보자에게 내기 골프를 권유해서 돈을 따간 A선배 같은 사람이 적지 않으니 신라스베이거스가 유행하는 것도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 <정제원의 골프 비타민>은 150회를 끝으로 작별을 고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다음 주부터는 성호준 기자가 쓰는 <골프 진품명품>이 연재됩니다. 명품 골프용품의 탄생 뒷얘기와 골프 스타, 유명인사들의 용품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들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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