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이세돌’ 2011 바둑판 흔들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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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2월 랭킹에서 박정환 9단이 최철한 9단에게 2위 자리를 내주며 3위로 밀렸다. 작은 변화지만 이 속엔 2011년 한국 바둑의 현주소가 함축돼 담겨 있다. 1993년 1월 11일생으로 이제 만 18세가 된 박정환은 누구나 인정하는 ‘이세돌의 후계자’다.

그는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에 오른 뒤 최단기간, 최연소 기록을 동시에 세우며 9단에 올랐고 2010년 12월엔 드디어 랭킹 2위에 오르며 부동의 1위 이세돌 9단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왕좌 자리를 건 두 천재기사 이세돌 대 박정환의 신구 대결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오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85년생 소띠 세력의 강자 최철한 9단이 농심배 4연승과 천원전 우승 등의 눈부신 활약으로 박정환을 3위로 끌어내렸다. 박정환이 이세돌을 타깃으로 하기까지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월의 랭킹과 딱 1년 전인 2010년 2월의 랭킹을 비교하면 바둑판 윤곽이 좀 더 선명해진다. 당시는 이창호 9단이 1위, 휴직에서 막 돌아온 이세돌 9단이 2위, 최철한 9단이 3위, 박정환은 4위였다. 이 중 이창호 9단이 1년 후 7위로 밀린 건 엄청난 변화다. ‘이창호 신화’가 석양을 맞이하며 1위 이세돌의 존재가 뚜렷해졌고 추격자들 간의 세력 구도도 좀 더 분명해졌다. 또 한 가지, 전성기를 지나 스스로 물러난 이창호를 제외하면 박정환은 1년 전에 비해 아직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83년생 이세돌과 박정환은 정확히 10년 차이다. 그 중간에 85년생 소띠 삼총사인 최철한-박영훈-원성진이 있다. 일격필살의 최철한, 소신산(小神算) 박영훈, 대기만성의 표본인 원성진. 이들은 이세돌을 넘지 못했지만 근 5년간 이세돌 주변을 철저히 차단해왔다. 그리고 최근 새롭게 꿈을 깬 허영호 7단(86년생)이 있고 89년생 쌍두마차 강동윤 9단과 김지석 7단이 칼을 갈고 있다. 박정환에겐 이들을 넘어서는 게 일차 과제다.

 한국 바둑의 계보는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진다. 기풍으로 보면 실리(조남철)-두터움(김인)-실리(조훈현)-두터움(이창호)-실리(이세돌)로 이어졌으니 다음은 두터움 쪽의 박정환이 대세일 것 같다. 그러나 조훈현 9단의 한마디는 모든 판단을 잠시 유보하게 만든다. “박정환은 잘 둔다. 그러나 특별한 강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조훈현 9단은 ‘스피드’, 이창호 9단은 ‘계산’, 유창혁 9단은 ‘공격’에서 발군이었다. 이세돌 9단은 ‘전투’로 바둑 세상을 제압했다. 선혈처럼 명료하고도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일인자만의 무기, 그게 박정환에게서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고 조 9단은 말하고 있다. 조 9단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약점 없는 바둑보다 섬광이 느껴지는 그런 바둑을 더 높이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현재의 박정환은 전성기의 이세돌 9단을 꺾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나이가 10년 차다. 이세돌은 나이를 먹으며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변할 것이고 박정환은 어리니까 자신만의 무기를 창조해 낼 시간이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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