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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공기업 인사 ‘백박이 불여일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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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윤호
경제선임기자

2008년 여름, 갓 취임한 한 금융공기업 최고경영자(CEO)가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을 찾았다. 인사말이 끝나자 그는 별렀다는 듯 처우 문제를 꺼냈다.

 “형님, 제 급여명세서 좀 보십시오. 이거, 문제 아닙니까. 다른 CEO들도 마찬가지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어, 제법 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이거밖에 안 되나. 방법이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

 알아본다던 강 장관, 결국 뾰족한 수를 못 냈다. 용감하게 불만을 제기한 당사자도 영광스러운 자리에 입각한 뒤론 ‘박봉’ 얘기를 더 꺼내지 않았다.

 공공기관 CEO 연봉, 많이 줄긴 줄었다. 가장 셌던 금융공기업을 보자. 산업·수출입·중소기업은행장의 경우 한창 때 7억원을 훌쩍 넘었다. 지금은 1억6000만원 남짓이다. 수백조원의 자산을 관리하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의 연봉도 1억원이 채 안 된다. 공기업 1억6700만원, 준정부기관 1억3600만원, 기타 공공기관 1억3700만원. 이게 정부가 맞춘 기관장 평균 연봉이다.

 비효율의 온상이다, 신이 내린 직장이다, 세금만 축낸다, 그런데 왜 연봉 많이 주나 하는 비판에서 나온 결과다. 여론재판 식으로 정해진 면이 없지 않다. 당하는 사람들은 억울했겠지만 찍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할 사람들이 줄을 섰으니 내놓고 불평할 수가 없었던 거다.

 연봉뿐이 아니다. CEO로서 업무추진비도 통 크게 쓸 수 없게 돼 있다. 수많은 경조사를 상당 부분 자비로 부담하기도 한다. 고객을 상대로 영업해야 하는 입장인데도 주말에 골프 행사 한 번 하기 쉽지 않다. 경비 처리가 빡빡한 것은 물론 휴일엔 업무용 차량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대로 일하게 하려면 제대로 대우해 줘야 하는 법인데, 현실은 그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 공공기관 CEO 평가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고무적이다.

 “훌륭히 일 잘하는 분은 그 직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는 제도를 검토해야 한다.”

 “일을 잘하는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이 똑같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일 잘하는 CEO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시한 거다. 실적 좋으면 연임시켜 준다는 말인데, 잘만 하면 처우개선도 있을 법하다. 공공기관 CEO들에겐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다.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 허전하지 않나. 본질적인 게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인선이다. 능력 있는 인물을 뽑아야 평가도 제대로 할 게 아닌가. 인사를 그르치면 사후에 아무리 평가를 잘해도 소용이 없다.

 그동안 공공기관 CEO 인사엔 적잖은 잡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 정권 실세의 말처럼 공공기관 CEO가 제 잘나서 된 걸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또 은행처럼 엄연한 민간기업에서도 CEO 인사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나오지 않았나. 이런 사례들, 어디의 누구라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과거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랬다. 공공기관 CEO 인사, 심하게 말해 집권 논공행상의 잔치판이거나 퇴직관료의 노후대책 비슷한 면이 있었다. 요즘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이니셜로 시작하는 대학 출신들이 좋은 자리를 많이 가져간다. 전문가 영입이나 내부승진은 소수다.

 그래서 공공기관 직원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백박(百博)이 불여일빽(不如一back)’이라고. 박사 100명 정도의 실력이 있어도 든든한 백 하나에 못 당한다는 뜻이다.

 정권 초기에 취임했던 공공기관 CEO들, 올해 슬슬 임기가 돌아온다. 연임을 노리는 분, 새 자리를 위해 뛰는 분, 모두 대통령의 말에 귀를 쫑긋했을 터다. 그 말, 아주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인사에 옥석이 섞였는데, 이젠 잘 가리겠다’는 뜻으로 비친다.

 하지만 사후평가를 잘 하는 것만으론 반쪽만 보고 눈을 감는 거나 같다. 조금 무리하게 말을 만든다면 ‘백평(百評)이 불여일선(不如一選)’이다. 평가 백번 잘 해도 잘못된 인사 하나면 말짱 도루묵이다.

남윤호 경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