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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판 ‘공공의 적’ … 엘리트 경관, 어머니 살해 혐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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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002년에 개봉한 영화 ‘공공의 적 1’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펀드매니저인 주인공(이성재 분)이 부모를 살해하는 게 그것이다. 주인공은 폭우가 내리는 여름날 비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모 집을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다. 부모의 재산을 노린 범행이었다. 이 장면과 비슷한 사건이 대전에서 발생했다. 용의자가 펀드매니저에서 경찰로 바뀐 게 영화와의 차이다. 이 경찰은 경찰대를 나온 엘리트다.

 21일 오후 11시27분 대전시 서구 탄방동 윤모(68)씨 아파트. 검은색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등산화를 신은 괴한이 침입했다. 그는 할머니와 함께 있던 어린 외손자 2명에게 “움직이지 마라”고 겁을 줬다. 그리고 바로 등산화를 신은 발로 윤씨를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얻어맞은 윤씨는 갈비뼈 6개가 부러지는 등 크게 다쳤다. 범인은 22분 뒤인 오후 11시49분쯤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범인이 아파트에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은 CCTV(폐쇄회로TV)에 고스란히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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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22일 0시18분쯤 윤씨의 큰아들 이모(40)씨가 어머니의 집을 찾았다. 경찰대(10기) 출신인 이씨는 현재 대전경찰청 강력계장이다. 그는 경찰에서 “야근 중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신음소리가 들려 이상한 생각에 곧바로 어머니 집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그의 진술은 이어진다. “집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는 테이프로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풀어 줬더니 어머니가 ‘괜찮다’고 해 안정이 우선이라고 판단해 신고하지 않고 함께 잠을 잤다.” 하지만 어머니 윤씨는 22일 오전 4시쯤 숨을 거뒀다. 가슴속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경찰이 이모 계장을 용의자로 보는 것은 그의 설명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범죄 현장에서 어머니를 바로 병원으로 후송도, 신고도 하지 않았다. 현직 경찰인데도 범행 현장을 청소하는 등 증거 인멸 흔적도 발견됐다. 경찰이 이씨가 용의자라고 심증을 굳힌 배경에는 아파트 CCTV 화면도 있다. 화면 속의 범인은 헬멧을 쓰고 있었다.

 경찰은 헬멧에 착안해 수사 속도를 높였다. 탐문수사 끝에 이씨가 대전시 중구 오토바이 가게에서 사건 전날 헬멧을 구입한 사실을 확인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대전 둔산경찰서 육종명 형사과장은 “계단을 2개씩 내딛는, 헬멧을 쓴 남자의 모습이 이씨의 걸음걸이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또 범행 현장에서 이씨의 등산화 발자국도 4개나 나왔다. 경찰은 28일 이씨를 체포, 조사 중이다.

 경찰이 추정하는 범행 동기는 ‘돈’이다. 이씨가 평소 주식 투자로 억대의 재산을 잃었다는 주변 경찰의 진술에 따라 어머니의 재산을 노리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이씨는 어머니 명의의 통장에 있던 4억여원을 혼자서 거의 다 쓴 것으로 드러났다. 숨진 윤씨는 현금과 부동산 등을 합해 12억5000여만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이씨는 “어머니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며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경찰은 29일께 이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다.

 이씨는 1994년 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찰에 입문했다. 이후 줄곧 대전과 충남경찰청 관내의 수사 관련 부서에서 일했다. 2005년에 경찰대 출신 동기들보다 일찍 경정으로 승진했다. 대전경찰청 관계자는 “평소 이씨가 다혈질 성격이었지만 업무 처리만큼은 철두철미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대전=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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