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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기술 배워 1933년 종로에 첫선, 파마비 쌀 두 가마 값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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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20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동안 두 달에 세 번꼴로 편도 한 시간 반을 들여 머리를 깎으러 다녔다. 이사를 한 후에도 이전에 다닌 단골 미용실을 찾은 것이다. 그가 8년 넘게 한 미용실만 고집한 이유는 다른 미용실에 가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용실에 가면 머리 길이와 가르마의 위치를 알려주고 ‘수염은 깎지 말고 샴푸는 대충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지친다고 했다. 설명한다 해도 그대로 깎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한마디하고 의자에 앉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한국의 미용실

미용실은 머리 하는 곳이다. 자신을(머리 모양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무라카미에게 단지 머리만 깎는 곳이 아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가 된 것처럼, 우리 삶에서 미용실은 ‘머리 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소문의 진원지이자 유통의 허브가 미용실’이라는 말이 있다. 미용실에는 주부들을 위한 여성 잡지가 완비돼 있고 여성들은 마실 가듯 편하게 미용실에 들러 수다를 떤다. 20년 경력의 한 미용사는 “미용실에 오면 연예인이건 일반인이건 꾸미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맨 얼굴에 샴푸를 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1~2시간 동안 미용사와 함께하다 보면 솔직한 대화가 많이 오간다. 그러다 보니 고민 상담도 하고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흉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실은 일본에서 미용을 배운 한국의 1호 미용사 오엽주 여사가 1933년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안에 개원한 화신미용원이다. 유행을 주도하던 기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 머리 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화신미용원의 중요한 메뉴 중 하나는 ‘삼푸’였다. 요금은 1원50전~2원으로 당시 파마 가격이 쌀 두세 가마 값인 20원이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일반 여성에겐 샴푸만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광복과 6·25전쟁을 지나 70년대는 기술 경쟁이 화두였다. 미용기술만 뛰어나면 미용실 경영이 가능한 시기였지만 대부분의 미용실은 영세했고 미용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낮았다. 경제성장으로 고객의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서 미용업계가 호황을 맞은 80년대에는 로레알·웰라 같은 해외 유명 브랜드가 국내 미용시장에 진출했다. 미용실 경영에 마케팅 개념이 도입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고객을 유치하려는 미용실이 나타났다. 90년대는 국내외 대형 프랜차이즈가 등장한 시기다. 미용실 원장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던 방식에서 탈피해 고객관리·마케팅·인사관리 등이 전문화되고 전문대학에서는 미용 관련 학과를 만들어 미용사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켜 가는 과정에서 미용실은 남성 전용·컬러링 전문·클리닉 전문 등 세분화·전문화 됐다.

국내 미용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진다. 2005년 중국에 1호 점을 연 이훈헤어는 현재 중국에서 140개 가맹점을 운영하며 ‘미용의 한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5년까지 중국에 1000개 점포를 여는 게 목표라는 이재규 대표는 “한국 미용실이 외국에 진출하면 간판만 가는 게 아니라 미용 전문제품, 잡지, 언어, 가요 등 문화가 함께 진출하게 된다. 세계 최대 시장 중국에서 한국 미용의 세계화를 이룰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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