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마라, 날마다 걷다 보면 도착해 있을 테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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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08면

이로써 수기(修己)의 조목은 다 설파됐다. 이 지침을 따라가면 ‘인간의 삶’이 완성될 것이다. 그렇지만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적고 있듯, “무릇 위대한 것은 성취하기 어렵다.” 율곡은 중도에 그만 주저앉을 사람들이 걱정돼 돈독(敦篤)장을 덧붙였다. “『시경』이 말했지. 시작은 다들 거창하나 끝을 보는 사람은 드물다(詩曰, 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23>-돈독(敦篤),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

仁은 인간의 책무를 향한 도정
『논어』는 말한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인(仁)을 어깨에 매었으니 무겁지 않을 쏘냐, 죽은 이후에야 내려놓을 것이니 먼 길이 아닌가(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이를 감당하자면 “선비는 담대(弘)하고 강인해야(毅) 한다.” 대체 인(仁)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 물음에 아득해진다. 그 안에 고립과 소외, 이기를 넘어 ‘더불어’의 유대와 배려가 있다. 그 공감의 기초 위에서 사회적 정의, 정치적 질서가 구축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크게 ‘자연’이 시킨 일이며, 인(仁)의 책무는 우주적 힘의 공능에 동참하는 것이다. 『주역』은 말한다. “하늘의 운행은 꿋꿋하다. 군자 또한 스스로의 강함으로 쉬지 않고 노력한다(天行健, 君子以, 自强不息).”

군자(君子)는 이 순례의 길 위에 선 자다. 그는 “낮에는 수고롭게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삼가고 반성한다(君子終日乾乾, 夕若, 無咎).” “위대한 선왕께서는 어둑할 때 일어나 환한 마음으로 앉아 새벽을 기다렸다.” 흡사 거울을 닦고 옷의 먼지를 털 듯 마음, 그 ‘신의 거소(神明之舍)’에 쌓이는 더러운 찌끼를 날마다 씻고 정화해야 한다.

이 ‘날마다의 새로움(日新)’으로 덕(德)이 유지되고, 인(仁)이 숙성된다. 그때 정신의 빛은 밝게 사물을 비추고, 몸은 본래 갖춘 힘으로 사태에 부응할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밥 한 그릇의 시간에도 인(仁)을 어겨서는 안 된다. 급박한 사세를 당해도, 그리고 좌절과 절망의 시간에도 이 가치를 지켜야 한다(子曰.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이 노력이 깊어질 때 그의 삶이 곧 모범이고 교훈이 된다. 북송대 주자의 선배 장재는 그 성장과 감화를 이렇게 간명하게 정리했다. “말은 가르침이 되고, 행동은 곧 표준이 된다. 낮에는 적극적 성취를, 밤에는 통찰을 얻는다. 호흡의 순간에도 성장하며, 눈 깜빡이는 시간에도 자신의 본성과 대면한다(言有敎, 動有法, 晝有爲, 宵有得, 息有養, 瞬有存).”


태만한 자, 주저앉는 자들에게
그러나 이 자강불식(自强不息)이 쉽겠는가. 대체로는 ‘믿음’이 없어 걸음조차 떼지 않으려 한다. 제자 재여가 낮잠에 배꼽을 내놓고 코를 골았던 모양이다. 공자는 이렇게 혀를 찼다. “쯧, 썩은 나무는 글자를 새기지 못하고, 문드러지는 흙으로는 벽을 바를 수 없다. 내가 널 나무란들 무엇하리(宰予晝寢, 子曰. 朽木, 不可雕也, 糞土之墻, 不可<6747>也, 於予與, 何誅).” 재여는 인간의 길에 대한 공자의 기획에 별 관심이 없었나 보다.

길을 나서더라도, 우리는 그 힘들고 먼 도정에 그만 주저앉고 말기 십상이다. 공자는 말한다. “싹이 나고도 꽃이 피지 않은 것도 있고,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한 것도 있다(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 맹자는 “제대로 여물지 못한 곡식은 피나 가라지만도 못하다(孟子曰. 五穀者, 種之美者也, 苟爲不熟, 不如荑稗. 夫仁亦在乎熟之而已矣)”고 안타까워했다. 역시 인(仁)의 관건은 숙성(熟)에 있다. 정신의 밭은 경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팽개쳐 버려두어서도 안 되는 데, 그렇다고 송나라의 어리석은 농부처럼, “조장(助長)이라, 억지로 싹을 뽑아 올려서도 안 된다.”

두 번째 위험에 대해 율곡은 이렇게 충고한다. “공자는 선난후획(先難後獲)이라고 했습니다. 노력이 있으면 당연히 효과가 나타나는 법인데, 그것을 미리 기대하다니요. 지금 학인들의 병폐는 선획(先獲), 즉 미리 결과에 안달하는 데 있습니다. 기대만 잔뜩 할 뿐, 실지 노력은 아니 하기에, 착수도 하기 전에 싫증(厭倦)이 납니다. 이것이 학자들의 통폐입니다.”

먼길은 한걸음에 닿을 수 없고, 높은 고지를 한 달음에 뛰어올라갈 수 없다. “길을 따라 면면히 걷다 보면, 날마다 걷고 올라 물러서지 않는다면” 어느새 그곳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요컨대 ‘기대(期待)’는 금물이다. 불교 또한 ‘희망(希望)’을 내려놓으라고 충고하지 않던가.

‘인문’의 도정 방해하는 세 가지 습관
율곡은 이어 ‘인문’의 도정을 방해하는 세 가지 심리적 습관을 열거했다. (1)감각적 즐거움(聲色), (2)물질과 탐욕(貨利), (3)편견과 편향(偏私)이 그것이다. 이들을 대적하여 뿌리를 뽑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가야 할 길이다. 율곡은 격려 또한 잊지 않는다. “이 폐단을 향해 용감하게 후퇴 없이, 간난신고로 헤쳐나갈 때”, 그때 다음과 같은 ‘지식’의 변화가 찾아오고, 삶이 바뀌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에는 험난하던 것이 차츰 길이 뚫리고, 처음에는 뒤엉켜 있던 것이 점차 가닥을 잡고 정리됩니다. 처음 난삽하던 것들도 점차 시원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덤덤한 것들이 점차 맛이 깊어지고 의미가 살아납니다.” 이 넷은 실제로 ‘학문’을 걸은 사람의 체험담이 틀림없다. 그의 마지막 말은 놀랍다. “이렇게 공부가 즐거워지면 온 천하의 물건 가운데 이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게 됩니다. 외부의 것에 연연해 여기에 소홀 태만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것이 안자(顔子)가 말한, ‘그만 둘려도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의 실체입니다.”


한형조씨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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