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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니스 리더십 중국 외교의 실세, 다이빙궈 국무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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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궈(戴秉國)

‘세기의 만남’.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의 워싱턴 회담에 전 세계 시선이 꽂힌 한 주였다. 조화로운 세계를 외치면서도 ‘국익’에 부딪치면 주저 없이 ‘뿌(不·No)’라 외치는 후진타오 외교의 실세는 다이빙궈(戴秉國·대병국·70) 국무위원이다.

 1998년 4월 26일, 한 달 전 국가부주석에 막 취임한 후진타오가 한국을 찾았다. 차세대 중국 최고지도자의 첫 한국방문이었다. “위안화 평가절하는 절대 없다. 한국을 중국인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여행자유국가로 지정하겠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로 고통 받던 한국은 후진타오의 선물에 환호했다. 한국 방문에 앞서 일본에서는 31년간 단절됐던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외교에 문외한이던 후진타오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후진타오를 수행하며 막후에서 조정한 인물이 바로 다이빙궈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었다. 후진타오와 다이빙궈의 ‘관시(關係)’는 이렇게 맺어졌다.

 4년 뒤인 2002년 10월 후진타오는 16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에 선출되면서 중국 외교의 사령탑이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격인 중앙외사공작영도소조 조장을 맡게 된다. 하지만 중국은 인치(人治)의 나라다. 16명으로 이뤄진 외사소조에는 ‘내 사람’이 없었다. 장쩌민(江澤民·강택민) 전 주석의 복심인 탕자쉬안(唐家璇·당가선) 외교부장이 실무를 담당했다. 2005년 4월 후진타오는 장쩌민으로부터 군권을 정식으로 넘겨받았다. 후는 당시 외교부 차관이던 다이빙궈를 외사소조 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 당서기로 발탁한다. ‘후진타오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다이빙궈는 인구 802만 명의 소수민족인 투자(土家)족 출신이다. 중국 서남부의 가난한 구이저우(貴州)성에서 농부의 6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했다. 그는 쓰촨(四川)대 외국어학부에 합격해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졸업을 앞두고는 학교의 추천을 받아 전국적으로 50명을 뽑는 베이징 외교학원에 합격했다. 65년 그는 외교부 러시아·동유럽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69년 중·소 분쟁이 터졌다. 우수리강 유역의 전바오다오(珍寶島·러시아명 다만스키섬)에서 군사 충돌이 벌어졌다. 러시아 병사 58명과 인민해방군 수백 명이 숨졌다. 양국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다이빙궈는 당시 모스크바 중국대사관 말단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최선의 경우에도 인질로 억류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희생당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73년까지 무사히 러시아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 뒤 다이빙궈는 중국 외교부 내에서 대표적인 ‘러시아통’으로 성장했다. 차근차근 승진을 거듭한 그는 86년 러시아·동유럽국 국장에 올랐다.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해체되던 89년 헝가리 대사에 부임했다. 동유럽의 자유화 물결이 중국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소방대장’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귀국과 동시에 외교부 차관으로 승진했다. 95년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 부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중국의 외교는 국가 대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부와 당 대 당 정당외교를 책임지는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쌍두마차 체제로 이뤄진다. 외사영도소조는 이 두 채널을 총괄한다. 97년 15차 당대회에서 다이빙궈는 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된다. 동시에 대외연락부장으로 승진한다. 당시 공산당 중앙서기처 상무서기로 대외연락부를 관할하던 후진타오와 업무상 신뢰관계가 싹트기 시작했다.

2009년 방북한 다이빙궈가 김정일과 환담하고 있다.

2002년 말 북핵 위기가 터졌다. 중국 외교는 ‘러시아 스쿨’ ‘워싱턴 스쿨’ ‘재팬 스쿨’의 삼분 체제다.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김정일은 ‘재팬 스쿨’인 탕자쉬안과 ‘워싱턴 스쿨’인 리자오싱(李肇星·이조성)이 맡고 있던 외교 채널을 신뢰하지 않았다. ‘러시아통’이자 중국공산당과 북한노동당 채널의 책임자인 다이빙궈 대외연락부장이 투입됐다. 그는 김정일의 신임을 잘 활용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플랫폼 6자회담은 그의 작품인 셈이다.

 다이빙궈는 전략대화 전문가다. 2005년 외사영도소조 비서장에 오른 그는 미국·일본과 전략대화라는 양자 대화 메커니즘을 만든다. 그는 2005년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 미국 전 국무부 차관과 함께 미국과 중국을 전략적 협력 파트너 관계를 맺은 주인공이다. 6자회담이 파국으로 치달을 때마다 후진타오의 서한을 가지고 김정일과 회견하고 협의를 재개했다. 2006년 10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파빙지려(破氷之旅·얼음을 깨는 여행)’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특사도 다이빙궈였다.

 “단정하고 올바르게 처신하고, 근면 성실하게 일하라(正正派派做人, 勤勤懇懇做事).”

 다이빙궈의 자택 거실에 붙어 있는 글귀다. 이 말은 중국 제4세대 지도자 후진타오 외교의 체현자인 다이빙궈의 스타일을 잘 말해준다. 화려한 대사직 경력도 없는 그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중국의 ‘제1외교관’ 지위에 오른 비결이다.

 다이빙궈의 유일한 자산은 바로 장인이다. 중국 외교부에는 ‘금 거북이 클럽(金龜族)’으로 불리는 고위 관리들의 사위가 많다. 당(唐)나라 시대 고위 관리들의 관복 장식품이던 금거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왕광야(王光亞·왕광아) 홍콩·마카오 판공실주임, 왕이(王毅·왕의) 대만판공실 주임, 전 외교부장 리자오싱이 모두 외교원로의 사위다. 외교부 밖에서는 왕치산(王岐山·왕기산) 부총리가 선두주자 격이다. 다이빙궈의 장인인 황전(黃鎭·황진)은 공산당 군인 출신 초기 외교관이다. 프랑스와 헝가리 초대 대사를 거쳐 외교부 차관과 문화부 장관까지 올랐다. 헝가리 대사와 외교부 차관을 역임한 다이빙궈와 같다.

 다이빙궈의 부인 황하오(黄浩·황호)는 황전의 둘째 딸로 베이징 퉁런(同仁)의원에서 근무한다. 그녀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이 다이빙궈와 닮았다. 베이징 외교가에서 이따금 펼쳐지는 자선사업 외에는 언론 노출을 꺼린다. 슬하에는 상무부에서 근무하는 외아들 다이시(戴希·대희)가 있다. 며느리 황웨(黄躍·황약)는 중국중앙방송(CC-TV)의 아나운서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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