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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효종을 좌절시킨 김육의 애민 고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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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영정 : 대동법 실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육은 조선 최고의 경제 전문가였다. 젊은 시절 가평에서 하층민들의 힘든 생활을 몸소 체험했던 그는 영의정까지 지내는 동안 안민(安民)과 애민(愛民)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만, 신은 사람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지금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늘과 적(敵)과 백성입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도 백성이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1654년(효종5) 김육(1580∼1658)이 올린 상소 내용이다. 임금은 무엇보다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는 1656년에도 같은 내용을 강조하는 글을 올린다. “재해는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천심(天心)이 그 급박함을 경고한 것입니다…. 또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사그라지고 무(武)가 강하고 문(文)이 위축되어 그런 것입니다.”

 김육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당시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으려 청에 대한 북벌(北伐)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란 직후 심양에 끌려가 장기간 볼모 생활을 했던 효종의 집념은 대단했다. 북벌을 위해 술까지 끊었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병력을 늘리고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조처들을 강구했다. 수시로 군사훈련을 참관하는가 하면 재정과 인력 확보를 위해 도망간 노비들을 추쇄하는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즉위 이래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해마다 기근이 들었다. 1656년에는 태풍 때문에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이 죽었다. 그럼에도 효종은 군비 강화책을 밀어붙인다.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급급한 백성들이 병졸로 차출되고, 도망 노비를 색출하기 위해 추쇄어사들이 고을로 들이닥쳤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소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서는 도적 떼가 날뛰기 시작했다.

 김육은 효종에게 맞섰다. 무리하게 병력을 늘리는 것을 중지하고, 가혹한 추쇄사업을 완화하고, 기근에 시름하는 백성들부터 구호하라고 촉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민생이 무너지고 국가 기반도 흔들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효종의 고집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신료들을 대거 주살했던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의 사례를 거론하며 노비 추쇄에 제대로 실적을 내지 못하는 관원에게는 사율(死律)을 적용하겠다고 나섰다. 죽일 수도 있다는 위협이었다.

 김육도 물러서지 않았다. 1658년 8월, 죽음을 앞두고 병석에서 올린 상소에서도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흉년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고 있는데도 병력을 늘릴 생각만 하고 있다’고 효종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백성이 편안하지 않으면 군사도 소용없다’며 반성하라고 촉구했다. 곧이어 그가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탄식한다.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처럼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효종도 결국 애민을 강조했던 김육의 고집과 충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