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동차는 잘 모른다, 그게 되레 힘이 됐다 … 죽어가던 미국차 살려낸 변방의 3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인사이더가 만든 위기, 아웃사이더가 해결사로 나섰다. 망가진 미국 자동차 빅3 부활의 주인공들, 그들은 자동차 문외한(GM의 댄 애커슨·사진 왼쪽)이거나, 항공사에서 반평생을 보냈고(포드의 앨런 멀럴리·가운데), 아예 이방인(크라이슬러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이다. 고난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살아남기만 한다면 전보다 더 강해진다는 그들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만났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회복할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난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만 한다면 전보다 더 강해지는 법이다.”

미국 최대 자동차 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의 댄 애커슨(63) 회장의 말이다.10일(현지시간) 2011 북미국제오토쇼(디트로이트 모터쇼)가 개막하기 직전 본지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모터 시티(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가 돌아왔다. 이 도시에 본거지를 둔 미국 자동차 ‘빅3’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뜻이다.

2009년 파산보호 신청을 했던 GM과 크라이슬러는 지난해 판매가 부쩍 늘었고, 재무사정도 나아지고 있다. 포드는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일본 도요타를 밀어내고 GM에 이어 판매 2위에 올랐다. 포드의 앨런 멀럴리(66) 회장은 “이젠 소비자가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차를 만들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 디트로이트 모터쇼는 미국 ‘빅3’가 세계를 상대로 부활을 선언하는 자리다. 신차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최고경영자(CEO)의 변화다. 지난해 9월 GM의 CEO로 취임한 애커슨은 이전에 자동차는커녕 중공업 분야에서 일해본 적도 없다. 포드의 멀럴리 회장은 항공기 업체인 보잉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크라이슬러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59) CEO는 아예 외국인(이탈리아·캐나다 이중국적)이다. 각각 10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는 ‘빅3’가 모두 외부인의 손에 운명을 맡겼다는 뜻이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사이더’가 만든 위기=GM의 릭 왜거너(58) 전 회장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본사가 있는 디트로이트 주민도 그를 좋아했다. 그는 “재무통이지만 숫자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는 평도 들었다. GM 입사 후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회사 내 인맥도 탄탄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GM은 고효율 차를 원하는 소비자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기름 소모량이 큰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 개발에 매달렸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필요해졌지만 정에 이끌려 쉽게 메스를 들지도 못했다. 왜거너는 ‘최악의 CEO’라는 불명예와 함께 2009년 3월 퇴진했다. 3개월 뒤 GM은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포드도 마찬가지였다. 창업자 헨리 포드의 증손자인 빌 포드(54)는 2001년 CEO가 된 뒤 회사 내부의 관료주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미국·유럽·아시아 등의 지역 본부는 협력은커녕 툭하면 영역 다툼을 벌였다. 잦은 순환보직 때문에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임원도 드물었다. 직원들은 상사와 회의를 하기 전에 미리 자기들끼리 모여 왜곡 보고를 위한 사전회의를 열곤 했다. 크라이슬러도 조직 운영의 효율성에서 다른 두 회사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

 ◆‘아웃사이더’가 해결사로=가장 먼저 위기를 느낀 것은 포드였다. 빌 포드 회장은 2006년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잉의 상업기 부문 최고책임자를 지낸 멀럴리를 CEO로 초빙했다. 변화를 위해선 새 피의 수혈이 불가피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멀럴리는 취임 후 포드의 고위 임원을 불러모아 문답식 회의를 했다. 지시를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했다. 또 포드의 전 세계 실적을 매주 차트로 만들어 회의실 벽에 붙이도록 했다. 윗사람에게 나쁜 소식을 숨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1~2년 단위로 자리를 바꾸던 순환 보직도 없앴다. 다가올 위기를 예감하고 포드 자산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미리 240억 달러를 빌려놓기도 했다. 덕분에 포드는 2009년 경쟁자인 GM·크라이슬러가 나란히 파산보호 신청을 할 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멀럴리 회장은 10일 본지 기자에게 “내가 과거엔 분명히 ‘에어플레인 가이(guy)’였지만 이젠 ‘자동차 가이’로도 불릴 만하지 않느냐”며 웃었다.

 ◆경영 스타일은 3인3색=포드의 멀럴리가 전략가 스타일이라면 GM의 애커슨은 야전사령관처럼 저돌적이다. 그는 미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장교 출신이다. 파산보호 신청을 한 GM 이사회에 그를 집어넣은 것은 미 오바마 정부다. 그는 지난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에게 후원금을 냈었다. 오바마 정부가 그의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능력을 샀다는 얘기다.

 그는 괄괄한 성격이다. 최근 공식 행사에서 경쟁자인 도요타의 하이브리드차 프리우스를 “괴짜(geek) 자동차”라고 언급하며 “나는 절대 타고 싶지 않다”고 말해 도요타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냐는 질문에 “사람마다 취향이 다양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20여 년 전 담낭 질환으로 독일의 병원에 입원했다가 의사들이 느려 터졌다며 스스로 주사바늘을 뽑고 퇴원해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사람들이 그가 이끄는 GM이 빠른 속도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크라이슬러의 마르치오네는 ‘기업 회생의 마술사’로 불린다. 이탈리아 피아트자동차의 CEO이기도 한 그는 2009년 피아트가 크라이슬러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크라이슬러를 함께 맡게 됐다. 그는 피아트 CEO에 취임한 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며 기존 경영진·관리직을 대거 해고했다. 노조의 요구에 대해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확실히 거부하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켰다. 마르치오네는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CEO로 꼽힌다. 주간 평균 업무시간이 70시간이 넘을 정도다. 직접 보고를 받는 조직만 80개에 달한다. 피아트는 그가 취임한 지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그에게 ‘아웃사이더’로서 어떤 자세로 크라이슬러를 바꿔나가겠느냐고 묻자 “변화를 위해선 겸손(humility)과 속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고 답했다.

 경영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세 사람에겐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기존 조직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망가질대로 망가졌던 ‘빅3’가 빠르게 원기를 찾아가고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디트로이트=김선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