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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반한 한국 <18> 대만 여행작가 대니 원의 전주비빔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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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배 부르게 만든 ‘예술’

대만 여행작가 대니 원이 예술작품 감상하듯이 관찰했다는 전주 비빔밥. 대니 원이 찍어서 보낸 사진이다.

나는 대만의 여행작가이자 음식 칼럼니스트다. 하지만 나는 올가을 한국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음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불고기와 김치, 그리고 ‘신(辛)’자로 시작하는 인스턴트 라면이 내가 알고 한국 음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한국의 비빔밥을 알게 됐다. 삼계탕·냉면·순두부·자장면·한정식 등 수많은 음식을 먹어봤지만 내 인상에 가장 깊게 남은 건 전주에서 먹었던 비빔밥이었다.

 식당에서 아주머니가 식탁 위에 전주비빔밥을 올려놨던 순간을 기억한다. 일순간 다른 반찬 접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황동 그릇 안에 알록달록 놓인 식품 재료가 나를 유혹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볍게 그릇을 들어올려 좌우로 흔들어보며 예술작품을 감상하듯이 자세히 관찰했다.

 밥 위에 놓인 재료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고, 급기야는 나지막하게 “와!” 하는 탄성을 질렀다. 나는 이 서민의 음식 한 그릇에 들어 있는 예술과 미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맛을 음미하기 전이었는데도 눈요기만으로 이미 절반은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식탁 앞에서 요리조리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얼른 열심히 비벼서 먹어야지, 뭐하느냐”는 일행의 핀잔이 들려왔다. 이 그릇 안의 예술을 차마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지만 촬영은 어쩔 수 없이 끝내야 했다. 그리고 나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재료를 비벼낸 맛을 보지 않는다면 비빔밥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 아닌가. 서울에서 자그마치 세 시간이나 차를 달려 여기까지 온 이유는 결국 원조 전주비빔밥의 맛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나는 독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어 그릇 안의 재료를 한바탕 비볐다. 이때 맞은편에 앉은 한국인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예요. 비빔밥은 골고루 비빌수록 더 맛이 있어요.”

서울서 3시간, 시간이 아깝지 않은 맛

신기한 건, 비빈 뒤의 비빔밥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맛은 이상하게도 더욱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맞은편 친구하고 ‘정말 맛있네’라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한 입 한 입 숟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일은 어찌나 유쾌하던지!

나는 비빔밥에서 고추장의 역할이 궁금해졌다. 처음엔 고추장의 강하고 텁텁한 맛이 재료 본연의 맛을 쉽게 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 고추장은 각 재료의 균형을 맞추고 맛의 부드러운 배합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맛을 돋우고 간을 맞추는 기능도 있어 각종 재료의 맛을 단계마다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살짝 매운 느낌은 침의 분비를 자극시켜 만족감까지 더해주니, 고추장의 놀라운 역할은 차라리 감동에 가까웠다.

 옛날 양반들은 전주비빔밥을 서민 음식이라 하여 밥상에 내지 못하게 했단다. 내 생각에 그건, 양반들이 애초에 음식을 어떻게 즐기는지 몰랐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입맛을 돋우기만 한다면, 또 혀를 춤추게 할 수만 있다면 내게는 그게 최상의 미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비빔밥은 시각적 향연과 최상급 미각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 더욱 중요한 건, 채소와 고기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 영양학적으로도 건강한 음식이라는 사실이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나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행복으로 가득한 맛을 찾아서라면, 짧지 않은 세 시간의 이동도 할 만해, 할 만해!”

정리=손민호 기자
중앙일보·한국방문의해 위원회 공동기획

대니 원 Danny Wen

1967년 대만 출생. 현재 대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행 전문가이자 가장 유명한 중화권 여행작가다. 1992년 데뷔 이래 중국어 여행 가이드북과 요리책 18권을 출간했으며, 책 대부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TV·라디오·잡지 등 여러 매체를 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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