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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훈장 팽개치며 항일 선비의 유품 3000점 ‘햇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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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명암 이태일 선생의 손자 이철기(왼쪽)씨가 소장 자료를 기탁하기 전 국학진흥원 임노직 국학자료실장에게 고문서를 설명하고 있다. [국학진흥원 제공]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이 지난해 12월 29일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1860∼1944) 선생의 주손 이철기(75·대구 거주)씨에게서 한국학 연구자료 3000여 점을 기탁받았다.

 이들 자료는 선생의 문집과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소장품으로 고서 972책, 고문서 2067점, 서당 편액 등 서화 54점 등 총 3093점이다. 자료 중 『명암집』『정학통록』 『태평책』『대학회의』『홍범정오』『태극해』 등은 선생의 저술이며, 『용산답문록』『언행록』 등은 문인들과 대화록이다. 특히 『태평책』은 유교의 연원을 밝힌 한글 가사다.

 명암은 한말 고향인 영천시 자양면에 용산서당·용산정사 등을 세우고 후학을 기르며 유가의 의리와 자주의식에 투철했던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안동지역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선 김흥락·이만도·김도화 등과 긴밀히 교류했다.

 그의 곧은 성품을 보여 주는 일화 하나.

 1913년 일제가 선생에게 ‘한일강제병합기념훈장’을 전하자 명암은 크게 분노하면서 거절했다. 일본 경찰은 그래도 칼을 들이대며 훈장을 받지 않으면 목을 베어 일왕에게 바치겠다고 위협하자 명암은 “나의 목이 베일지언정 훈장을 받을 수는 없다”며 훈장을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그의 당당한 위엄에 일본 경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서 명암은 ‘육산가(六山歌)’를 지어 훈장을 거부하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육산가는 절의의 상징인 서산 백이숙제 등 호에 ‘산’ 자가 들어가는 중국 여섯 선비의 고고한 기개를 본받겠다는 내용이다. 그는 육산가에서 ‘굶으면 서산(西山)을 본받겠고 먹으면 첩산(疊山)을 본받으리. 숨어서는 우산(盂山)을 본받겠고 피하면 비산(鼻山)을 본받으리. 살아서는 냉산(冷山)을 본받고 죽으면 문산(文山)을 본받으리. 만나는 대로 육산(六山)을 본받겠으니 구릉도 가히 산을 배우리라’고 읊었다.

 이후 명암은 죽음까지 불사한다는 서사문(誓死文)을 지어 민족의 위기를 자신의 생명과 바꾸려는 유가의 의를 그대로 보여 주었으며 풍운의 시대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나라 사랑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자료를 검토한 임노직 국학자료실장은 “명암은 퇴계학맥의 마지막 선비 중 한 사람”이라며 “독립운동 현장보다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선비”라고 평했다.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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