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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천사’ 요세프 멩겔레(1)

중앙일보

입력

“But the great tragedy of Science - the slaying of a beautiful hypothesis by an ugly fact - which is so constantly being enacted under the eyes of philosophers... 그러나 과학의 가장 큰 비극은 추악한 사실로 인해 아름다운 가설이 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철학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그런 비극이) 계속 일어 나고 있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 영국의 동물학자, 진화론 옹호자, ‘다윈의 불독’ –

아마 과학자들 가운데 요세프 멩겔레만큼 혹독한 비난을 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대표적인 악의 화신으로 찍힌 과학자다. 악마의 피를 이어받아 태어난 의사가 있다면 바로 나치 치하의 멩겔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잔인한 악마의 표상이며 공포의 화신이다.

악마의 표상이자 공포의 화신

멩겔레는 독일 명문 뮌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 내과의사였다. 그는 유전학과 우생학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1943년 봄 어느 날. 유대인들을 가득 실은 수송열차가 경적을 울리면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도착했다. 수송열차라기보다 유대인이라는 짐짝을 쑤셔 넣어 실은 화물열차였다.

도착하자 마자 열차에 실려 있던 독일군인들은 유대인들은 밖으로 끌어내렸다. 더디게 행동하는 노약자들은 군화 발길질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열차에 실렸던 유대인들, 집시, 그리고 일부 소수민족들은 이 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과 싸운 전쟁포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치에 저항한 반체제 정치인들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세상에서 최고 품질의 혈통인 게르만의 피를 이어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혐의는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고귀한 피를 오염시켜왔으며 게르만 민족의 몸 속으로 들어가 영양분을 집어 먹는 기생충이자, 병을 일으키는 세균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게르만 민족사회에서 박멸(撲滅)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생사결정권을 쥔 나치 친위대 대위

독일군의 살벌한 감시아래 길게 늘어선 유대인들은 어리둥절한 채 떨고 있었다. 불길한 운명이 다가오지 않길 기원하면서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독일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생사가 기로에 달려 있는 순간이었다.

그들에게 생(生) 노동이었고 사(死)란 가스실에서 죽는 일이었다. 건강하고, 그래서 부려먹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강제노동이었고, 그러한 가치가 없는 사람은 곧장 가스실로 직행했다. 또 있다. 어린이들을 포함해 일부는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유대인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파이프 담배를 연거푸 빨아대며 멸시에 가득 찬 냉소를 보내는 독일군 장교가 있었다. 말쑥한 군복 차림을 한 이 장교는 대단한 미남인데다 한눈에 상당한 교육을 받은 인텔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장교는 사병들이 자기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지를 확인하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바로 이 장교가 ‘죽음의 천사’ 요세프 멩겔레다. 유대인들의 생사여탈권을 뒤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에 생과 사, 강제노역과 가스실로 분류 결정됐기 때문이다.

나치독일의 권력 가운데 권력인 친위대(SS) 장교이자 아우슈비츠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 의사인 그는 병을 치료하러 온 의사가 아니다. 뮌헨 대학출신의 엘리트인 그는 수용소로 실려온 수감자들 가운데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강제노역에 동원할지를 결정했으며 생체실험으로 누구를 쓸지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굴곡으로 얼룩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당시 독일 점령지였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는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집단학살 수용소로 변모했다. 철로의 교차점으로 소도시였지만 교통이 편리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자. 아우슈비츠는 독일 서남부, 그리고 체코와 인접하고 있는 폴란드의 남부 공업도시 크라쿠프 서쪽으로 약 50㎞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 터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있다. 폴란드명은 오슈비엥침이다. 철도의 교차점으로 화학•피혁•농기구 제조 등이 이루어진다. 13세기 이후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폴란드분할시대인 1772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18년 폴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에는 1939년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크라쿠프는 독일 군정청이 들어서 있어서 독일군이 관리하기가 쉬웠다. 또한 주위에 공업단지가 많아 수용소로써는 제격이었다. 대량학살의 처참한 과거만큼이나 아우슈비츠 도시 역사도 처참한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정신장애, 동성애자, 집시,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돼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絶滅)을 위해 광분했던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 아래 나치 친위대 (SS)가 이곳에 첫 번째 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이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그 뒤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세워졌다. 1945년 1월까지 나치는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는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수용되거나 처형된 사람들은 비단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로마인, 옛 소련군 포로, 정신장애인, 동성애자, 그리고 나치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인들도 포함됐다. 또한 공산주의자들과 특히 헝가리 집시들도 수용돼 일부는 처형됐다.

이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게르만 민족사회라는 유기체에 해악을 가하고 는 병균이자 조직을 갉아먹는 해충들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학에서 우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멩겔레는 자신의 논문을 실질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자신의 우생학적 주장을 다양한 생체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바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이 전혀 통하지 않는 전쟁은 대단한 기회였다. 수용소에는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실험용 쥐들이 너무나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온갖 실험을 실시할 수 있다.

뿐만인가? 뒤에는 자신과 꼭 같은 생각의 우생학의 신봉자 히틀러 총통이 있지 않은가? 엘리트 내과의사 멩겔레의 연구는 영원한 게르만 민족의 융성을 위한 위대하고도 숭고한 작업이었다. (계속)

김형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