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올 경제성장률 발표 왜 4번씩 바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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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지난 10월7일 경제성장률 전망을 수정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11일 열린 국정감사에선 일부 국회의원들이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며 의혹을 보내기도 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장미빛 환상을 심어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그같은 전망을 할 리 없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또 한편에선 한은의 성장률 전망을 순수하게 경제적인 시각으로 대하면서도 한은의 경제예측 능력이 형편없다며 혹평하기도 했다. 어쨌든 경제전망에 있어 가장 권위를 가졌다고 자부해온 한은으로선 이번 일로 인해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졌다.

한은은 “경제 상황이 예상을 벗어나 자꾸 달라지고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이미 흠집난 이미지는 쉽사리 복원될 것 같지 않다.

사실 한은의 경제전망은 몇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전망의 순수성 여부. 7일 나온 전망은 예정된 게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불쑥 발표됐다. 한은 실무자들도 “부랴부랴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다. 늘 통계를 접하기 때문에 급조를 한다고 해서 ‘날탕’을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문제는 왜 그 시점을 택했느냐이다.

같은 날 재정경제부는 한국이 9월중 순채권국으로 전환됐을 것이라는 기사를 내놓았다. 오비이락인지 여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대우사태로 부정적인 뉴스만 양산되는 상황이어서 정부가 희망적인 뉴스를 제공할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관측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금융대란설’이란 것도 심리적 요인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은이 자체적으로 분위기 반전차원에서 경제전망치를 수정해 내놓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7일 이전까지 한은은 여러 모로 시달렸다. 인건비가 모자라 한은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1백91억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한 탓에 곤경에 몰렸던 게 대표적이다. ‘발권력을 동원해 직원들 호주머니를 불린다’는 따가운 여론 앞에 한은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해졌다.

그에 앞서 한은은 긴축가능성으로 보도된 전철환 총재의 ‘워싱턴 발언’으로 꽤나 몸고생, 마음고생을 했다. 금융시장이 불안한데 왜 그같은 발언을 해서 주가를 폭락시키느냐, 경제장관들간에 정책혼선이 있는 게 아니냐는 질책 앞에 한은은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나 어떤 배경을 갖고 있던 간에 남들이 수긍할 만한 전망이라면 사소한 허물은 덮어지게 마련이다.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GDP 기준)
이 연간 8.8%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부터 따져보자. 한은은 8.8%까지 포함해 올들어 네번씩이나 성장률 전망을 수정했다. 1월에 3.2%로 전망한데 이어 4월에는 3.8%, 7월에는 6.8%로 높였다. 전망이라는 게 틀릴 수 있고 또 수정하기 위해 전망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수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정치가 종전 전망과 터무니없이 차이날 때 전망의 신뢰성은 충분히 위협받을 수 있다.

한은의 이번 수정 전망이 바로 그같은 케이스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경제의 올해 성장률을 볼 땐 작년의 재고감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중 재고변화는 통상 GDP(국내총생산)
의 1% 이내이다. 그러나 98년에는 GDP의 7%에 달하는 28조원의 재고감소가 발생했다.

작년의 이상(異常)
재고감소는 외환확보와 현금흐름 개선을 위한 금 수출, 유휴설비 매각, 생산 및 유통재고의 감소 등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올해에는 재고감소폭이 조금만 줄어들어도 경제성장률이 크게 상승하게 된다. 실제 지난 상반기중 재고감소폭이 작년의 18조원에서 7조원으로 축소돼 재고효과만으로 성장률은 5.1%포인트 반등했다는 게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이다.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7.3%였던 것을 감안하면 재고효과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상반기 중 반도체 생산의 경제성장기여도는 3%포인트로 분석되고 있다. 다시 말해 상반기 성장률 7.3% 중 반도체생산 증가를 제외할 경우 4.3%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재고효과나 반도체 같은 변수는 최근 들어 부각된 게 아니다. 상반기부터 이미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었다. 물론 소비, 수출, 설비투자등 성장률을 움직이는 다양한 인자(因子)
가 있기 때문에 특정한 요소 몇 개만으로 성장률을 예단할 순 없다. 또 한은은 속성상 보수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예측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경제를 안정성장으로 유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이제 와선 ‘한은이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했느냐’는 비난이 나온다. 경제통계를 늘 만지는 입장에서 성장률 전망치를 불과 2~3개월 사이에 그렇게 바꿔도 되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국경제의 내년 성장률 전망을 6.4%로 본것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많다. 전철환 한은 총재는 “내년도 경제전망 6.4%는 대우구조조정이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금융시장이 안정되는 걸 전제로 했다”고 설명했다.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내년 중 성장률을 전망한 것이다.
그러나 대우사태 및 금융불안은 해외 투자자들이 우려하듯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자칫 잘못 풀리기라도 한다면 금융불안이 실물경제의 발목을 잡는 불행한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같은 징후는 이미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금융기관간 자금흐름은 경색돼 있고, 금융기관에서 기업으로 흘러드는 돈줄도 그리 원활치는 않은 모습이다. 신용경색이 재연될 가능성마저도 거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중앙은행이 최상의 시나리오를 전제했으니 의혹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또 올해 물가는 0.8% 내에서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해 놓고, 내년 물가는 3.8% 뛰어오를 것으로 예상한 대목도 도마에 올랐다. ‘선거 때 춤출 물가를 용인하겠다는 뜻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보다 더한 논쟁거리는 경제상황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리는 현수준에서 유지하겠다는 한은의 통화정책기조다.

한은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물가불안에 선제적으로 대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해 왔다. 인플레이션 조짐이 보이면 금리를 올리거나 긴축을 통해 잠재우겠다는 것이었다. 한은의 설립목표도 물가안정으로 돼 있다.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고유가 등으로 물가는 이미 꿈틀거리는 마당인데도 한은의 금리정책은 변함이 없다. 한은은 여기에 대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라는 부연을 단다. 금융대란설이 횡행하고 있는 탓에 이같은 현실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금리를 고수하겠다는 이면에 혹시라도 정치논리가 끼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는 표를 의식해 선거전에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정부는 대우사태와 금융불안이 조기에 진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조기에’라는 말이 ‘내년 4월까지’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불안양상이 조기에 수습되면 한은도 물가안정에 더 신경쓸 수밖에 없다. 그 때에 한은이 독자적인 금리정책을 수행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이성태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economist.joongang.co.kr) 제 508호 199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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