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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횡성까지 번진 날, 백신 꺼낸 ‘팬데믹 파이터’의 고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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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구제역 방역의 실무 총책임자인 주이석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질병방역부장이 23일 오후 인터뷰 도중 현장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다. [조용철 기자]


한마디로 전쟁이다. 총성만 없을 뿐이다. 전선은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고 있다. 방역망의 마지노선이 따로 없다. 구제역과의 대치 상황, 그만큼 긴박하다.

 23일 오전 7시. 아침부터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에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주이석(52) 질병방역부장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 십중팔구 구제역 발생 보고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였다. 전날 신고된 강원도 원주의 구제역 의심증상이 양성으로 판명됐다는 보고였다. 그나마 양양에선 음성으로 판명된 게 위안거리다. 태백산맥 방어선은 지킨 셈이다.

 이쯤되면 ‘팬데믹(pandemic·전염병의 대유행)’이다. 걱정할 틈도 없이 경기 안양의 검역원 사무실에 잠깐 들러 자료를 챙긴 뒤 정부과천청사 농림수산식품부로 향했다. 백신 접종 범위와 방식에 대해 동물방역협의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다. 전날 오후 8시부터 이날 새벽 2시까지 전문가회의에서 격론 끝에 만들어낸 방안이다. 이번 구제역이 공식 확인된 지 26일째. 주 부장은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방역대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구제역 대책의 총사령관은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다. 발생 지역에선 현지 지방자치단체장이 방역 책임을 맡는다. 검역원에 마련된 비상대책상황실의 본부장은 이주호 수의과학검역원장이다. 모두 ‘구제역 파이터’들이다. 하지만 감염 여부 검사와 역학조사, 방역 대책에 관련한 모든 정책은 주 부장에게서 출발한다. 백신 접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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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검역원은 구제역에만 매달리고 있다. 검사실은 20명이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고, 시료채취팀은 2명 1개 조로 30개 팀이 신고 즉시 현장으로 출동한다. 13개 역학조사팀은 감염 경로를 파악한다.

 주 부장은 현직 공무원 중 최고의 구제역 전문가다. 누구나 그를 ‘팬데믹 파이터’로 인정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전남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3년 검역원에 입사한 뒤 줄곧 동물질병과 싸워왔다. 공부도 계속해 서울대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구제역이 66년 만에 발생했을 땐 역학조사위원으로 현장을 누볐다. 2002년 발생 때도 구제역 담당인 해외전염병과장을 맡고 있었다.

25일부터 접종할 구제역 백신. [연합뉴스]

 경험이 없었던 2000년엔 초기부터 전국적으로 백신을 접종했다. 이내 구제역은 잡혔지만 결과는 혹독했다. 잘나가던 돼지고기 수출이 딱 끊겼다.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회복하는 데 1년이나 걸렸다. 농가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번 구제역 초기에 백신 사용을 꺼렸던 이유다.

 하지만 이번 주 들어 마음을 바꿨다. 경기 연천·양주에 이어 파주·가평 등으로 구제역이 퍼지면서다.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것은 방역망이 바이러스 전파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부장은 “초기에 오염원을 없애면 소강상태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확산이 멈추지 않았다”며 “이젠 추가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동물보건기구(OIE)가 2003년 규정을 바꾼 것도 고려했다. 청정국 지위 회복 신청 자격이 생기는 기간을 마지막 백신 접종 후 1년에서 6개월 뒤로 줄인 것이다. 살처분만 했을 때는 마지막 매몰 후 석 달이 지나면 신청자격이 생긴다. 그 때문에 백신을 접종해도 석 달만 더 기다리면 된다. 이주호 원장은 “감염이 계속돼 3개월을 끌 수도 있으니 백신으로 불길을 빨리 잡는 게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21일 국무회의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퍼지지 않게 잘 대처하라”고 주문했다. 유정복 장관은 22일 가축방역협의회를 소집했다. 주 부장은 백신 접종을 강하게 개진했다. 장관의 결정은 주 부장의 판단대로 내려졌다.

 접종지역은 경북 안동과 예천, 경기 파주와 고양·연천 등 5개 시·군으로 한정했다. 이 중 안동은 전 지역, 나머지 지역은 구제역 발생 농가를 중심으로 10㎞ 이내다. 이 지역에서 기르는 소·돼지는 13만3000여 마리. 강원도가 제외된 것은 농가가 서로 많이 떨어져 있고, 소규모 사육이 많기 때문이다. 접종지역 밖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면 살처분으로 대응한다는 게 주 부장의 작전이다.

 접종은 구제역 발생 농장에서 3㎞와 10㎞의 원형 포위망을 그리고 동시에 바깥에서 안쪽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이를 ‘링백신’이라 한다. 현재 수의사와 검역원 직원, 농협 직원 등 800명의 접종요원이 출동 태세다. 4명이 1개 조를 구성해 200개 팀이 성탄절인 25일부터 접종을 실시한다. 1월 초 1차 접종이 마무리되고 한 달이 지나면 2차 접종을 한다.

 주 부장의 가장 큰 걱정은 접종 이후의 바이러스 전파다. 이날만 해도 강원 횡성·강릉·원주와 인천 강화, 경북 군위·영천에서 의심신고가 추가 접수됐다. 그는 “축산 농가들이 서로 걱정돼 위로하고 싶겠지만 제발 모임을 갖진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에겐 전선(戰線)이 하나 더 있다. 축산농가의 반발과 소비자들의 오해가 그것이다. 구제역은 사람에겐 옮지 않는다. 하지만 구제역 탓에 소나 돼지고기의 소비가 준다. 특히 백신 접종이 되고 나면 그런 현상이 뚜렷해진다. 농가가 반발하는 이유다.

 “지금 백신이 다가 아닙니다. 농가와 소비자들의 오해를 푸는 게 큰 문제입니다. 백신을 맞으면 더 안전합니다. 육류나 우유, 다 안전합니다.”

 근거 없는 걱정에 소비를 줄이진 말아달라는 그의 말, 호소에 가까웠다.

글=최현철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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