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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비사-김대중 ②] 김대중과 박정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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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박정희
월간중앙 그의 고난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붙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는 ‘똑똑하고 말 잘하는’ 야당 의원으로서 박정희가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찬성해 ‘사쿠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베트남에 파병된 국군장병을 위문하러 가기도 했으며, 미 국무부 초청으로 동료 의원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고난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정치판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54년이었다. 그 해 목포에서 출마해 낙선한 그는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제4대 총선 때는 현역이 있는 목포 지역구를 피해 군인 유권자가 80%였던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려고 했다.그러나 자유당 후보가 경찰을 동원해 등록 자체를 방해하는 바람에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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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해보려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사단장의 관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사단장은 부재 중이었다. ‘사단장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당번병에게 물어보았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려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장군님이십니다.’ 그 후 관사를 다시 찾았지만 사단장은 여전히 부재 중이라고 해서 결국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나의 삶 나의 길>)

박정희와의 첫 대면이 이렇게 무산된 것에 대해 김대중은 훗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 만났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그 뒤 치러진 보궐선거와 총선에서 내리 낙선하는 바람에 첫 부인(車容愛)까지 잃는 아픔을 겪다가 1961년 보궐선거에서 겨우 비원을 달성했으나 사흘 뒤 5·16이 나는 바람에 이것도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백수 신세로 전락한 그는 부산 피란시절부터 알았던 YWCA전국연합회 총무 이희호와 다시 만나 1962년 5월 재혼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열흘 만에 전민주당 인사들의 이주당(二主党)사건에 연루돼 3개월간 수감됐다. 첫 아내를 잃으며 4수 만에 확보한 국회의원 자리와 어렵게 시작한 재혼 초(初)를 망친 박정희에 대해 그의 원망은 골수에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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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씨 등 24명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런데 다음해인 1963년 2월 중앙정보부의 고모 국장으로부터 “앞으로 중용하고 우대할 테니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응했다면 박정희 쪽에서 일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그 제안을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5대 대선을 앞두고 재건된 민주당(당수 박순천)의 대변인이 되자 박정희를 겨냥했다. 즉 박정희가 현역에서 물러난 뒤 공화당에 입당한 것은 절차상 국가재건특별조치법에 위반되므로 공화당 입당과 대통령 후보등록은 무효라는 지적이었다. 검토해보니 그의 주장이 맞았다. 이에 박정희는 서둘러 특별조치법을 개정토록 했다.

대선 직후 치러진 6대 총선에 당선된 뒤에도 그의 포화는 시종 박정희를 겨냥했다. 김준연(金俊淵)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해 장장 5시간19분에 걸친 의사진행 발언을 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 또한 궁극적으로는 박정희를 겨냥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도 국회에서의 내 활동을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국회라는 단체를 상대해야 했던 그로서는 사사건건 문제점을 짚고 나서는 내가 의식되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한 번은 국무총리와 모든 각료들이 내 추궁에 쩔쩔매고 돌아간 뒤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에게 모두가 휘둘렸다고 대통령에게 역정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나의 삶 나의 길>)

그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7대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는 “김대중의 당선만 막으면 여당 후보가 열 명, 스무 명 떨어져도 상관없어” 하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권노갑,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 1999)

실제 박정희는 목포까지 두 번이나 내려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목포의 개발을 약속하는 등 여당 후보(金炳三)를 적극 지원했으나 종내 김대중을 꺾지 못했다. 그런데다음해 신정(新正)에 김대중이 느닷없이 청와대의 신년하례식에 참가한 것이다. “세배객은 주로 공화당과 정부인사들이었고 그 사이에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을 발견한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는 것이다. ‘각하, 목포에서 많은 공약을 약속하셨는데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해주셔야죠?’ ‘합시다. 그렇게 해야죠.’ 흔쾌히 답했는데 실행은 없었다.”(이희호, <동행>) 야당 의원이 갈 자리도 아니었는데 그는 왜 불쑥 청와대 신년 하례식에 참석했던 것일까?

김대중과 우회전략
1968년은 김대중의 행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해였다. 이 무렵 그가 최초의 저서로 출간한 <분노의 메아리>에 보면 제1편 제목은 ‘서생적 문제의식’이고 제2편 제목은 ‘상인적 현실감각’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서생적 문제의식’이 그를 청와대로 향하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라이벌인 박정희를 만나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직접 말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상인적 현실감각’의 문제가 노정된 것은 그 해 5월 신민당 전당대회를 통해서였다. 당시 부총재 자리를 놓고 계파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그는 유진오(兪鎭午)-유진산(柳珍山) 라인에 합류했다. 유진산을 밀어주는 대신 원내총무 자리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 합류 조건이었다. 이에 따라 총재에 선출된 유진오는 그를 원내총무에 지명했으나 종래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의 견제로 인준이 부결됐다.

충격을 받은 김대중은 “총재님과 지지 의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이 시기에 그가 생각한 것은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문제다. 당시 야당은 구파가 주류였다. 신파의 2선 경력으로 구파의 4선 경력을 지닌 김영삼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여기에서 우회전략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그는 “세계 전쟁 사상 정공법으로 돌격해 승리를 거둔 예는 단 1할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승리가 우회전술이나 잠복, 작전상 후퇴 또는 내부교란 등 간접적인 전법으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우회전략에 따라 그가 눈을 돌린 것은 원외 세력이었다. 원내총무 자리는 원내 세력에게 좌우되지만 그보다 높은 자리, 곧 대통령 후보 자리는 원외 세력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7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나서자 이에 합류한 김대중은 전국 지구당을 누비며 밑바닥 표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열세인 원내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제2계파의 수장 이재형(李載灐)과 손잡고, 신파의 이철승(李哲承)계에는 “만일 이철승 씨가 지명이 안 되면 나를 도와 달라”는 세컨드 초이스(second choice) 전략을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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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에서 유세 중인 신민당 김대중 후보.

개표 결과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였다. 1위의 과반수 확보 실패에 따라 2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부인과 함께 지방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을 돌고 난 김대중은 재투표에 들어가기에 전 기자들에게 승리를 장담했다. 그의 말은 적중했다. 결과는 458대410으로 뒤집혔다. 갈채와 함성이 장내에 진동하며 김대중을 축하했다. 김대중에 이어 축하연설에 나선 김영삼은 “김대중 씨의 승리는 나의 승리”라며 김대중으로부터 선대본부장 제의가 올 것을 기대했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글을 남겼지만(<김영삼회고록>, 2000)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는 “그때 본진 유세단 일원으로 부산 유세에 갔을 때 (김영삼은) 후보가 아닌 본인의 1975년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기에 유진산 총재가 하는 수 없이 2진으로 뺐다는 뒷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동행>)

김대중과 7대 대선
여당은 조직이고 야당은 바람이다. 자금과 조직 면에서 우세한 박정희를 이기기 위해 이론과 정책 면에서 승부를 걸어 이것으로 선거의 주도권을 잡아 야당 바람을 일으킨다는 선거전략은 반공포로 출신으로 인제 선거에서 부터 김대중을 도왔던 엄창록(嚴昌錄)과 함께 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 10월 16일, 김대중은 박정희를 향한 포문을 열고 ①향토예비군 폐지 ②4대국 안전보장론 ③남북교류와 평화통일론 ④대중경제론 등의 메가톤급 포탄을 날렸다. 정부 여당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국민은 호응했다. 여기에 김대중의 사자후가 유권자들 사이에 불고 있는 선풍을 태풍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1971년 1월 23일 그는 연두기자회견에서 “대중반정을 실현하자”고 외쳤다. 대중반정(大衆反正)은 그의 이름을 딴 대중반정(大中反正)도 되기 때문에 시중에 화제가 되었다. 회견을 마친 뒤 그는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그 직후인 설날 밤 동교동 집 마당에서 원인 모를 폭발물이 터졌다. 경찰은 사건을 수사한다며 그의 조직 총책인 엄창록을 연행해갔다.

본래 함경도 원산 출신인 그는 김대중에 대한 지역적 연고는 없었다. 몸이 약했던 그가 여당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자 “내게는 큰 타격이었다. 참으로 아쉬웠다. 엄창록은 선거의 귀재였다. 선거판세를 정확히 읽고 대중심리를 꿰뚫는 능력을 지녔다”고 김대중은 훗날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다.(<김대중자서전>, 2010)

저쪽으로 넘어간 1970년대의 제갈공명은 “김대중에게 승리하려면 지역감정을 자극하라”고 여당 캠프에 귀띔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공화당의 반격이 시작되었지만 전국을 누빈 김대중의 유세장에는 그의 말솜씨를 듣기 위해 구름처럼 청중이 몰려들곤 했다. 결정판은 선거를 사흘 앞둔 1971년 4월 18일 장충단공원 유세였다.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인 100만 인파가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그는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고 경고했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민심의 바다에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개표 결과 박정희 634만 표, 김대중 539만 표였다. 엄청난 자금과 조직을 총동원하고도 김대중 하나를 간신히 이긴 박정희는 선거 다음 날 “내가 골똘히 생각해봤는데 이거 안 되겠어” 하고 김종필(金鍾泌)에게 말을 꺼냈다고 한다. 김종필이 “뭐가 안 되겠습니까?” 하자 박정희는 “나는 빈곤을 추방하려고 열심히 일했어. 그런데 이 사람(김대중)을 놓고 국민이 나를 대접하는 것이 고작 이것뿐이야” 하며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주돈식,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2004)

그 다른 생각이 ‘10월 유신’의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년 반 뒤다. 후폭풍은 김대중 쪽에도 있었다. 포석의 문제였다. 선거기간에 내놓았던 정책들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이를테면 향토예비군 폐지-4대국 보장론-남북교류는 군(軍)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고, 대중경제론은 대기업→재계를 그의 적으로 만들었으며, 그 해 말 8대 국회에 등원해 그가 중앙정보부를 집중공격한 일은 수사기관→관(官)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군-관-재계는 군사정권을 받쳐주는 3대 기둥이었다.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는 것은 어떤 특정인의 미움을 샀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집단이기 때문에 거부감은그 특정인이 사라져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일생 동안 가장 높고 뾰족한 가시를 찾아 헤맨다는 그의 ‘가시나무새’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대중과 반(反)유신 투쟁
정권 차원에서도 박정희의 대안, 곧 ‘포스트 박’으로 국민에게 인식된 김대중의 이미지를 다운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중앙정보부였고 완성시킨 것은 안기부였다. “끊임없이 반복하면 네모도 원이 된다”는 괴벨스(Goebbels)의 선전술을 원용해 그들이 만들어낸 김대중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격하고-폭력적이고-선동적인)용공이고, 다른 하나는 (임기응변에 능하고-신의가 없으며-기회주의적이고-정략적이며-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교활간교한 인간상이었다.(조갑제) 이미지에 역사성은 없다. 일단 형성되면 출처는 사라지고 그 이미지만 남게 된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 5공 초에 쓰여진 신문기사를 하나 소개한다. “김대중, 그는 어떤 인물인가? 달변과 간교한 지략을 내세워 한국의 케네디라는 허상 속에 철저히 가려졌던 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화신’ 바로 그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이중인격과 위선에 가득 찬 그의 인생 경로는…”라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경향신문>, 1980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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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지 닷새 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 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납치된 경위 등을 밝히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라도 싫어할 만한 이미지의 소유자가 되어가던 김대중은 대선 직후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를 치료하러 일본에 건너갔다가 ‘유신’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음 날 기자회견을 갖고 “이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라고 박정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 후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反)유신운동을 펴나갔다. “정적인 김대중이 가까운 일본에서 반유신세력을 키워간다는 것은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유신을 망가뜨리는 것이었고, 자신의 후계문제에서나 체제안정을 위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론은 쉽게 난 듯했다.

1973년 8월 8일 오전 10시경, 일본 동경 팰리스호텔에 체류하던 김대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주돈식) 납치사건이었다. 중정 요원들에게 끌려 강제 귀국하게 된 김대중이 초췌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니 “여당은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김대중의 자작극이다.’ 그보다 더욱 기막힌 것은 야당이었다. 유진산 총재도 그렇게 믿었으며 채문식 대변인도 동조했다.”(<동행>) 그만큼 정국이 경색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치를 하고 싶어도 박정희는 그의 제도권 진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여기에서 그는 원외 재야세력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비주류 출신의 그에게 우회전략은 낯설지 않았다. 그는 1974년 11월 27일 정계·종교계·학계·언론인·법조인·문인·여성계 등의 재야인사 71명과 연대해 반(反)유신운동을 위한 ‘민주회복국민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낭독한 것은 이우정(李愚貞)이었지만 선언문을 기초한 것은 김대중이었다. 그는 수감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79년 3월 4일, 윤보선 자택에서 재야세력의 연합체인 ‘국민연합’을 구성하고 윤보선·함석헌과 함께 3인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중도통합의 이철승 대신 선명노선의 김영삼이 총재가 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었다. 민주화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제도권 밖에서 재야세력과 연대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얻은 실리는 명분의 선점이었다. ‘민주화’의 명분이야말로 그에게 덧씌워진 이념과 지역성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명분이나 사명감은 그 진정성을 인정받는 시점부터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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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집행정지 중 정치활동을 문제로 민추협 공동의장 김대
김대중과 서울의 봄
10·26으로 유신체제가 사라진 뒤 제도권 밖의 시선은 민주화의 명분을 선점한 김대중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실력자로 등장한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그의 가택연금 해제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대중은 용공”이라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를 용공으로 몬 것은 12·12쿠데타로 정승화를 제거한 신군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정착된 이미지는 바꾸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1980년 3월 1일을 기해 사면복권되자 그는 재야 13개 단체를 이끄는 ‘국민연합’에 복귀해 조직을 개편하고 대권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재야의 생각은 민주화 투쟁을 해온 자기들이 새 시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주도권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사회에서의 경쟁은 당연한 것이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신군부는 제도권 밖의 김대중과 제도권 안의 김영삼 간에 벌어지는 ‘양김 경쟁’을 구실로 5·17정변을 단행했다. 그들은 당일로 김대중을 구속했고, 김영삼은 앞에 나서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다음 날 기자회견을 했기 때문에 자택에 연금시켰다. 이처럼 제도권 안과 밖의 처우가 달랐다. 이희호는 “김대중은 재야와 감옥에서, 김영삼은 제도권과 집에서 독재와 투쟁했다. 동교동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면, 상도동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존방식을 고민했다”고 회고했다.(<동행>)

시도 때도 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중앙정보부의 지하 취조실에서 그는 2달 만에 신문을 얻어 보게 되었다. “5월 17일 중앙정보부에 들어간 내가 5월 18일 (광주)사태를 조정했더란 말이에요. 홍길동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이 짓은 못할 거예요.”(김진배, <인동초의 새벽>,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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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김대중·김영삼·윤보선·양일동, 4자회담이 열렸다.

그는 결국 국가내란음모죄와 반국가단체 수괴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광주사태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선동한 국가내란음모죄의 최고형은 무기징역이었기 때문에 신군부는 그가 의장에 취임하지도 않았던 일본 ‘한민통’의 문제를 끌어들였다. 반국가단체 수괴죄의 최고형은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은 EU 가맹국들이 한국 정부에 공동으로 항의해야 한다고 호소했고, 미 국무부는 “극형이 내려진 것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다”면서 김대중에게 씌워진 혐의는 ‘far-fetched’, 곧 견강부회였다는 성명을 공식발표했다.그의 구명을 위해 전두환과 협상을 벌인 것은 레이건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 리처드 앨런이었다. “앨런은 김대중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전두환의 백악관 방문과 양국관계 정상화를 약속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레이건 취임식 다음 날인 1981년 1월 21일 백악관은 전두환의 방미(訪美)가 곧 이뤄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3일 후 전두환은 계엄령을 해제하고 김대중의 형량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한다고 발표했다.”(돈 오버도퍼) 그 후 석방돼 미국에 망명했던 김대중은 김영삼의 단식 투쟁 뉴스를 접하자 1000여 명의 교포와 함께 워싱턴과 뉴욕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1984년 5월 18일 민추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가 다시 귀국한 것은 총선을 4일 앞둔 1985년 2월 8일이었다. 군사정권의 암살기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떠돌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에드워드 페이건, 토머스 포글리에타 하원의원 등 미국 인사들이 동반 귀국했다.

▶[정치비사-김대중 ①] DJ "호남사투리 고치라고? 내 정체성인데 싫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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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FTU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다시 읽는 하멜표류기><김우중의 대도전><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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