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평생의 건강이 결정되는 자궁 속의 삶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당뇨병·고혈압 같은 성인병과 유방암 등은 유전자 결함이나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발병한다고 생각해 왔다. 최근 이런 이론들을 수정하는 혁명적인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세상에 첫 울음을 내기도 전 태아였을 때의 환경 조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존 카터가 73년 전 영국 런던 북부의 웨어에서 태어날 당시 담당의는 체중 1.5kg인 그가 과연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카터는 이렇게 기억했다. “그들은 나를 간유에 적신 솜으로 감싸 탕파(湯婆: 잠자리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더운 물을 채운 용기)
위에 눕힌 뒤 만년필 촉으로 내게 브랜디를 먹였다. 어찌 보면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해 창고관리인으로 일하며 50대 초까지는 건강한 삶을 누렸다. 그러다 한번 신체검사 결과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을 발견했다. 또다른 검사에서는 성인이 돼 발병한 당뇨병까지 나타났다.

흔히 그런 병은 대부분 유전적 결함이나 그릇된 생활양식 또는 환경 유해물질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의 첨단연구 결과 그의 고혈압과 당뇨병은 뿌리가 수십 년 전 그의 태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과학자들은 산모에게서 태아로 전달되는 호르몬과 태반이 태아의 각 기관에 영양분을 얼마나 잘 공급하는지 등의 조건이 그 태아가 성인이 된 뒤의 건강을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

신저 ‘자궁 속의 삶’(가제·Life in the Womb)
에서 이 문제를 파헤친 미국 코넬大의 피터 너새니얼즈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우리가 일생 동안 누리는 건강이 상당 부분 우리가 태아였을 때의 환경, 이를테면 우리의 간·심장·신장, 특히 뇌기능을 프로그램화할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가위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궁 속에서의 조건이 성인병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은 질병이 유전적 요인에 크게 좌우된다는 기존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동안 성인병은 기름진 음식 섭취처럼 오랜 기간 몸에 밴 잘못된 생활방식 탓으로 돌려졌지만 사실은 ‘태아기 프로그래밍’의 결과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의과대학원의 매슈 길먼 박사는 이를 “공중보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다. 놀라운 것은 그같은 발견이 임신중의 상태가 신생아의 건강을 형성한다는 기존 인식을 훨씬 능가한다는 점이다. 알코올이 태아에게 전달되면 신생아의 지능저하와 심장 결함을 일으킬 수 있다거나 담배의 독성물질이 태아에게 전달될 때도 기관지와 귀에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알려졌다. 그런 유해 물질은 태아에게 직접 해를 끼침으로써 결함이나 감염을 일으켜 출생시나 그후에 바로 문제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사실들은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첫째, 과학자들이 말하는 임신기간 중의 조건이란 독성물질과는 거리가 멀며 단지 아주 미묘한 상황적인 차이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섭취하는 거의 모든 것을 체지방으로 변화시키도록 신진대사 패턴을 재프로그램하는 조건들을 말한다.

둘째, 유해물질은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즉시 나타나지만 ‘태아기 프로그래밍’의 효과는 흔히 수십 년 뒤에야 나타난다. 다시 말해 출생시 체중 4kg인 여아가 수십 년 동안 완벽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유아기 때 체지방이 쌓이게 만드는 바로 그 조건(태반을 통해 태아로 전달되는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 같은 ‘성장요인’)
이 유방 조직에 영향을 미쳐 사춘기 후 에스트로겐이 분비되면 46세쯤 됐을 때 유방암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병을 어머니 탓으로 돌린다거나 첫울음 소리를 내기도 전에 정해져버린 자신의 운명에 무력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태어난 뒤에 어떻게 사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만 자궁 속에서의 조건들이 성인이 된 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조건들을 알면 추후의 위험 요소들을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예방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궁 속의 조건을 시사하는 지표는 출생시 신장·체중·몸통둘레·머리크기 등이다. 예를 들어 출생시 복부가 비정상적으로 작았다면 肝 크기도 작을 것이므로 정상 크기의 肝만큼 콜레스테롤을 분해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50세가 되면 콜레스테롤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태아기 프로그래밍’은 영국 사우샘프턴大의 데이비드 바커 교수가 아니었더라면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 84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주민들의 보건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00년대 초 신생아 사망률은 심장병 사망자가 많은 곳에서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대개 신생아 사망률은 빈곤율에 비례하며 심장병은 버터나 육류 섭취 등 풍요의 질병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 둘은 같은 곳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심장병의 원인을 산모의 자궁 속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그의 가정은 여기서 출발했다.

성인들의 건강과 그들의 태아 때 상황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연구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많은 양의 출생기록을 확보해야 했다. 결국 영국 의학연구협회가 나서 그 기록들을 찾기 위해 옥스퍼드大의 역사학자 한 명의 도움을 얻었다. 그 역사학자는 2년 동안 기록 보관소뿐만 아니라 각 가정의 다락방·창고·보일러실까지 뒤져 출생기록을 찾았다. 그러나 가장 좋은 자료는 하트퍼드셔에서 발견됐다. 1911∼1945년 사이 그 지역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들(존 카터를 포함)
의 체중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바커가 그 자료에 기초해 하트퍼드셔와 셰필드에서 태어난 1만3천2백49명의 남성들을 연구한 결과 출생시 체중이 2.5kg 이하였던 사람이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률은 출생시 체중이 더 나갔던 사람들에 비해 50%나 높은 것을 발견했다. 바커는 “뇌졸중과 심장 관상동맥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은 출생시 체중이 적은 남성 가운데서 가장 높았다”고 말했다. 특히 출생 당시의 신장이나 머리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중이 가벼웠던 사람들(태아의 성장이 방해받았다는 증거다)
에게서 발병률이 높았다.

바커는 96년 인도에서 수집한 출생기록에서도 똑같은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여기서도 저체중아의 경우 특히 중년에 심장 관상동맥 질환이 발병할 가능성이 높았다. 예를 들면 출생시 체중이 2.5kg 이하였던 42∼62세 연령 집단에서는 11%가 관상동맥 질환에 걸린 반면 출생시 체중이 그보다 무거웠던 같은 연령 집단에서는 발병률이 3%에 지나지 않았다. 출생시 저체중과 심장혈관계 질환의 상관관계는 ‘태아기 프로그래밍’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인종과 성별을 초월해 나타나고 있다. 하버드의 재닛 리치-에드워즈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은 97년 7만2백97명의 미국 여성중 출생시 체중이 2.5kg 이하였던 사람들이 심혈관계 질병에 걸릴 확률이 통통하게 태어난 사람에 비해 23%나 높은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출생시 저체중 그 자체가 수십 년 뒤에 심장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태아의 성장을 저해한 자궁 속의 열악한 조건들이 심장병을 유발하는 위험 요인들을 내포한다는 뜻이다. 리치-에드워즈는 “출생시 체중은 자궁 속에서 태아의 성장과 훗날 질병에 걸릴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요인들을 포괄하는 지표”라고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의심이 가는 몇 가지 요인을 발견했다. 너새니얼즈는 이것이 크기가 평균 이하인 신장을 가진 경우처럼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신장은 혈압 조절을 돕는 기능을 하지만 힘에 부치면 고혈압으로 이어져 심장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동물 실험에서 밝혀진 것처럼 태아가 충분한 단백질 공급을 받지 못하면 태반에 있는 특정 효소가 방어력을 잃게 돼 태아에 침투하는 유해 호르몬을 막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런 발견이 잇따르자 학계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美 역학연구협회가 1년 전 ‘태아기 프로그래밍’에 관한 연례 회의를 개최했을 때는 작은 회의실의 절반이 겨우 찼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올 봄, 같은 주제에 대한 회의는 대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리치-에드워즈는 “이 문제가 이제야 진지하게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런 관심의 고조는 과학자들이 출처를 자궁으로 지목하는 질병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美 국립보건연구원(NIH)
은 올 1월 자궁 내의 조건과 유방암의 상관관계에 대한 회의를 개최했다. 지난 9월 열린 또다른 NIH 회의는 자궁 내의 상태와 심혈관계 질병·신장 질환 및 다른 질병의 상관관계를 검토했다. 하버드 의과대학원에서도 오는 11월 같은 주제에 대한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가 자궁 속의 상태와 유방암의 상관관계다. 유방암의 위험요인으로 꼽히는 것은 나이가 많거나, 가계내 유방암 환자가 있거나, 30세 이전에 임신하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위험요인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유방암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원의 캐린 미셸스는 한가지 간과돼 온 원인을 알아냈다. 미셸스는 동료와 함께 많은 간호사들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한 끝에 지난 97년 출생시 체중이 약 2.5kg이던 여성의 경우 출생시 체중이 약 4kg이던 여성에 비해 유방암에 걸릴 위험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미셸스는 “유방암이 태아기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증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출생시 체중이 많이 나간다는 것은 유방 조직이 암을 유발하기에 ‘적절한 상태로 만드는’ 자궁 안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지표일 가능성이 높다. 성장요인은 말 그대로 태아의 발육을 촉진한다. 그 인자에는 인슐린·렙틴·에스트로겐이 포함된다. 임신부가 이런 호르몬을 많이 갖고 있고(예컨대 비만은 에스트로겐 수치를 높인다)
그것이 태아에게 전달될 경우 강력한 작용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런 호르몬들은 악성요인이 됨으로써 발달기의 유방조직을 변형시켜 사춘기 때 에스트로겐에 반응하도록 해 유방암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태아에게 영양 공급을 제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태아의 성장이 방해받으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출생시 체중이 많이 나갔다면 특히 유방암 검사에 신경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문가들이 밝혀내는 다른 연관성에서도 마찬가지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출생시 체중을 비롯한 여러 특징은 개인이 질병에 걸릴 위험을 미리 알려줄 수 있다:

■콜레스테롤: 출생시 복부가 작을수록 성인이 됐을 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 임신부가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거나 태반 문제 때문에 태아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태아는 비상 태세에 돌입해 내장으로 가는 혈액을 가장 중요한 뇌로 돌리게 된다. 그에 따라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절하는 肝도 발육을 방해받는다. 왜소한 肝은 큼직한 肝만큼 콜레스테롤을 잘 분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高지방 및 高콜레스테롤 음식을 섭취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행운아들은 태아 때부터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효과적으로 잘 분해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돼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사우샘프턴大의 바커는 “태아가 자궁 속의 조건에 적응할 때 그 상태는 영구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비만: 비만은 자궁 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지목된 특징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는 44년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서부 네덜란드를 봉쇄했다. 그 기간의 일부 또는 전부 동안 태아였던 남성들은 뚜렷한 패턴을 나타냈다. 그들의 어머니가 임신 첫 3개월(45년 3∼5월)
동안 굶주렸다가 그뒤에 충분한 음식을 섭취했을 경우 태어난 남자 아이들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태어난 아기보다 체중이 더 나가고 키가 더 크며 머리가 더 컸다. 그들은 성인이 됐을 때 비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의 어머니가 임신 마지막 3달 동안만 굶주렸다면(예컨대 44년 11월 태어난 경우)
대개 그들은 어른이 돼서도 날씬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 과정을 추정해보자.

임신 첫 3개월 동안 음식물 섭취가 적었을 경우 태아는 소위 말하는 ‘검약성 표현형’을 발달시킨다. 그 상태의 신진대사 패턴은 모든 칼로리를 비축하도록 설정된다. 또다른 면의 추론도 가능하다. 영양의 많고 적음은 태아 뇌의 식욕중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경우 태아 초기의 영양 부족으로 식욕조절 장치가 “언제 기아가 닥칠지 모르니 무엇이든 섭취하라”는 세팅으로 맞춰질 수 있다. 태아 초기의 영양 과다는 “과하게 섭취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세팅을 맞추게 된다. 임신 후반 영양부족을 겪은 태아는 지방세포 수가 적을 수 있다. 그에 따라 출생 후 비만이 될 가능성이 적어지는 것이다.

■당뇨: 영국 위생 및 열대의학 런던 대학원의 데이비드 리언은 출생시 여윈 상태라면 중년에 당뇨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효과는 매우 강력하다. 60세의 남성 가운데 출생시 비만 척도 5등급 가운데 가장 아래였던 경우 체중이 더 나가는 아기였던 사람들보다 당뇨에 시달리는 비율이 3배나 된다. 리언은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영양부족 상태가 태아로 하여금 검소형 신진대사 패턴을 발달시키도록 프로그램한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인슐린 저항도 포함된다. 그에 따라 신체가 저장된 포도당을 절약하고 통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신진대사가 패스트푸드 음식을 만나면 신체는 포도당이 과다하게 돼 당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당뇨는 자궁 속의 삶이 영구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반박하는 주요 사례가 되기도 한다. 리언이 발견했듯이 출생시 여위었을 경우 중년에 당뇨에 걸릴 가능성이 높지만 계속 날씬한 상태를 유지하면 그 위험성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뇌: 97년의 한 보고서에서 생물학자들은 발·손가락·귀·팔꿈치 같은 신체 부위에서 비대칭형을 가진 사람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비대칭형을 가진 사람의 IQ는 완전 대칭형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비례해 낮았다. 뉴멕시코大 랜디 손힐은 태아 발달기에 스트레스가 비대칭형 특징을 유발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그런 스트레스는 신경체계 발달에 손상을 끼쳐 감각·기억·사고를 관장하는 신경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따라서 비대칭형 특징도 자궁 속의 조건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것을 반영하는 지표가 된다.

‘태아기 프로그래밍’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인류가 모든 특징들을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데 너무 열중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너새니얼즈는 “프로그래밍은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상태를 결정하는 데 유전자만큼 중요하다”고 결론내렸다. 과학자들이 한 가지 특징에서 어느 정도가 유전적인 영향을 반영한 것이며, 어느 정도 환경을 반영한 것인지를 측정하는 표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쌍둥이 비교다. 일란성 쌍둥이가 다른 형제보다 더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 특징은 대부분 유전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쌍둥이는 유전자 외에도 공유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궁이다.

따라서 같은 유전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공통점 가운데 일부는 태아기에 공유했던 자궁 환경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궁은 또다른 효과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하나의 유전자를 가졌다고 해서 그와 관련된 특징을 나타낸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유전자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발현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궁 내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과다는 스트레스 반응과 관련된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이 약해져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스트레스를 잘 다룰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너새니얼즈는 “유전자에 각인된 내용도 자궁 안의 환경에 의해 변형된다”고 말했다.

‘태아기 프로그래밍’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면서 오랫동안 불신 받아온 라마르크의 진화론마저 부활하고 있다. 이 이론은 유기체가 일생 동안 얻은 특성이 자녀에게 대물림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임신하기 전 10년 동안 체력단련에 전념하면 그녀의 아기도 운동을 선호하는 상태로 출생한다는 것이다. 현대 유전학은 유전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태아기 프로그래밍’에 따르면 어머니가 얻는 일부 특성은 실제로 자녀에게 전달될 수 있다.

어머니가 당뇨가 되면 태아에게 포도당을 과다 주입하게 된다. 포도당이 과하면 발달하는 췌장을 압도해 인슐린을 분비하는 태아 세포를 지치게 만든다. 그 결과 자녀도 성인이 되면 당뇨병 환자가 되는 것이다. 이 아이가 임신을 하게 되면 그녀 역시 태아에게 포도당을 과다 주입하게 돼 태아의 췌장에 스트레스를 가하고 그 태아가 자라나 성인이 됐을 때 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 요인을 마련하게 된다. 결국 두 세대 전에 일어난 어떤 현상 때문에 당뇨병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유명한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에서는 태아가 특수 액체 속에서 자라는 센트럴 런던 부화장이 나온다. 그곳의 근로자들은 사회에 어떤 아이가 필요한지에 따라 양육 액체의 재료를 조절한다. 화학공장 직공이 될 아이들은 납과 카드뮴에 내성을 갖도록 적절한 재료를 섞는다. 로켓 조종사가 될 아이들은 뒤집히는 것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빙빙 돌려진다. ‘태아기 프로그래밍’의 비밀을 찾는 일은 그런 단순한 방법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태아기 프로그래밍’은 이미 건강의 씨앗이 우리가 첫 숨을 들이쉬기 이전에 뿌려지며 인생 가운데 자궁에서 보내는 짧은 9개월의 삶이 일생의 건강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With William Underhill in London

Sharon Begley 기자
뉴스위크 한국판(http://nwk.joongang.co.kr) 제 399호 1999.10.13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