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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3) 눈이 커다란 미국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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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2년 12월 방한한 미국 제34대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경기도 광주의 수도사단을 방문해 한국군 훈련을 참관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당선자, 이승만 대통령, 수도사단장 송요찬 장군. 사진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나는 필동 코리아하우스 자리의 미 8군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른 아침이었다. 나를 찾는 전화가 8군 사령부로부터 걸려 왔다. “동숭동 8군 사령부에서 오전 8시에 회의가 있으니 빨리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프에 올라타고 사령부로 직행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침 거리를 지나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일단은 브리핑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그동안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언질에 따라 준비해 왔던 브리핑 내용을 곰곰이 되씹어 보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별로 없는 성격이다.

 내 짐작대로 어젯밤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한국 땅에 온 것이 분명했고, 나는 그 앞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국군 증강계획을 설명해야 했다. 긴장감이 대단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충분하고 자세한 내용으로 이 절실한 대한민국의 과제를 미국의 최고권력자에게 브리핑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가 탄 지프는 벌써 동숭동 미 8군 사령부 정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1952년 12월 3일 오전 7시40분쯤이었다. 내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던 동숭동 사령부였다. 당시 전쟁으로 부산에 옮겨 간 옛 서울대 자리의 건물들이었고, 사령부 본부는 당시의 문리대 건물에 있었다. 문을 지키던 미 헌병들은 눈에 익은 내 지프를 보자 바로 정문의 차단기를 들어 올렸다.

 내 지프는 문리대 건물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관이나 참모 등을 대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 아이젠하워가 미 고위 장성들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추측건대 아이젠하워 당선자와 미군 지휘관들이 막 아침식사를 끝내고 2층의 사무실로 올라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마주쳤다. 그의 주변에는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도쿄에 있던 마크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아서 래드퍼드 태평양함대 사령관, 밴플리트 8군 사령관 등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에게 소개했다. 그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 나와 악수했다. 그는 눈과 입이 모두 컸다. 서양인 중에서도 눈이 꽤 커 보여 ‘사람 참 좋게 생겼다’는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합군을 모두 통솔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빈틈없이 펼쳐 승리로 이끈 덕장(德將)답게 인품이 온화해 보였다. 오마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51년 1군단장 시절 동해안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장군이었고, 마크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은 그가 방한할 때마다 함께 만나 친숙한 사이였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일행과 함께 2층의 8군 사령관 사무실로 올라갔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방한하면서 미 8군 사령관 집무실을 아이젠하워가 사용했고, 그 바로 옆의 8군 참모장실은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등이 썼다. 사무실의 주인공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은 참모장실 옆의 비서실을 사용했다.

 우리는 곧장 아이젠하워가 임시로 사용했던 8군 사령관실 안에 들어섰다. 방 안쪽 가운데에 있던 밴플리트 사령관의 책상에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앉았고 그 오른쪽으로 브래들리 합참의장, 래드퍼드 태평양함대 사령관,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밴플리트 8군 사령관 순으로 자리를 잡고 착석했다.

 나는 미 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라이언 소장과 함께 밴플리트 사령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앉아 있는 곳 반대편에는 내가 밴플리트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만들었던 한국군 증강계획 차트가 이미 걸려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자리에 앉은 뒤 배석한 미군 지휘관들과 유쾌하게 한두 마디씩의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대담 내용이 당시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브리핑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깊은 긴장감 속으로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앞서 열거한 미 최고위 지휘관, 그리고 나와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언 소장뿐이었다. 밖에서는 대통령 당선자의 경호를 위해 미국에서 따라온 미 경호원들이 사무실 정문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평소 늘 자유스러워 보인다. 계급의 아래위를 별로 따지지 않고 서로 친숙하게 호칭하면서 분위기를 가볍게 끌고 간다. 그때도 그랬다. 몇 마디 주고받는 인사말로 가볍게 대화가 이어지더니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처음은 엉뚱한 내용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소령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밴플리트 장군은 “존은 3사단에서 착실하고 안전하게 근무 중입니다. 각하께서 대통령에 당선되신 뒤 그의 보직을 일선 대대장에서 사단 정보참모로 바꿨습니다”고 보고했다.

 미 34대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공식 일정을 시작하면서 먼저 꺼낸 이야기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당선자 아들의 안부라는 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내막이 참 궁금하기도 했다. 밴플리트 사령관의 표정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공무를 집행할 때 아주 신중하면서도 치밀한 성격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이젠하워 당선자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신중한 표정으로 “보직에 관한 조치는 사령관이 알아서 결정할 일입니다. 어떤 자리에 존이 가더라도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단지 그가 적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습니다”고 대답했다. 대통령 당선자 아들의 안위가 먼저 회의 서두를 장식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그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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