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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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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일러스트:백두리 baekduri@naver.com]

혜련으로부터 내게 소식이 온 것은 몽 서방이 다녀가고도 두 달이나 지난 뒤였다. 처음 온 것은 낯선 풍경이 담긴 그림엽서였는데, 앞뒤 인사도 없이 리투아니아에 와 있다는 내용만 짤막하게 적은 것이었다. 여행 중에 잠깐 짬을 내어 관광지에서 산 것 같은 엽서 한 장에다 영어로 갈겨쓴 짤막한 두 문장과 멋 부려 쓴 발신인 서명이 내게는 왠지 난데없게 느껴졌다. 평소 그녀가 한국사람들과 소통할 때는 영어를 쓰는 법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문장의 내용이 엽서 끝에 적힌 그녀의 이름이 내게 준 기대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저예요. 저 지금 리투아니아에 와 있어요.’

 그렇게 휘갈겨져 있는 본문 뒤에서 무슨 암호처럼 붙어있는 ‘헬렌, 킴’이라는 이름을 확인했을 때, 내 머릿속에 그 존재를 해독하는 키워드처럼 떠오른 말은 이혼과 미국이었다. 너는 이혼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아무개 - 그런데 편지의 본문은 그 두 개의 키워드와 너무도 무관했다.

 나는 적어도 그녀의 첫 편지라면 최근 그녀에게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어떤 것에 관해 먼저 말할 것이고, 그것은 틀림없이 아직 석 달도 안 된 그녀의 이혼일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직접 나를 만나보고 얘기해주지 못한 전말을, 어쩌면 하소연이나 넋두리 섞어 말해줄 것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이 자신의 위치만 전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당연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녀가 있다는 리투아니아는 내게 그렇지가 못했다.

 그녀의 외가 쪽 혈통의 이산 역사를 들으면서 그 나라는 내게 인상 깊은 곳이 되었고, 그 때문에 몇 번인가 지도책과 백과사전을 들쳐 보아 그 나라에 대해서는 평균보다는 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됐을는지는 모르지만, 1993년 가을 그때까지도 여전히 리투아니아는 내게 추상에 가까운 나라였다. 연전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소련의 위성국 상태를 벗어난 동구의 그 어떤 나라보다 서구 지향적이라는 소문이 있기는 해도, 내 의식 속의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어딘가 아득한 세계 한 끄트머리에 있는 불행한 발트삼국의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혜련은 어디까지나 미국인이었으며, 그녀가 한국에서 상처 입고 돌아갔다면 그것은 당연히 미국이어야 했다.

 그녀의 두 번째 편지도 난데없다는 느낌에서는 첫 편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한 보름 뒤 이번에는 봉함엽서에 사진 한 장까지 덧붙이고, 본문도 한글로 적혀 있었으나 내용은 오히려 전보다 더 엉뚱하게 느껴졌다. 모래사장이 잘 드러나는 해변에서 햇살을 담뿍 받으며 풀어 내린 머릿결을 바람에 날리며 서있는 사진과 동봉된 엽서는 여전히 앞뒤를 다 잘라버린 사진설명 같은 내용이었다.

 ‘며칠 전 바닷가에 나갔다 찍은 사진인데, 옛날 일이 생각나서 한 장 보내 드려요. 제 머릿결하고 리투아니아의 모래빛깔, 어때요? 닮은 것 같아요? 어쨌든 금발의 제니는 아닌 것 같죠?’

 멀리 어머니의 조국에서 그녀가 굳이 나를 지목해 보낸 엽서에다 적은 것이 이십 년도 넘은 예전의 내 착각을 교정하는 내용이었다. 변형된 감상이거나 허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녀가 그것들을 그런 형태로 내게 드러내는 까닭은 여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그 ‘십자가들의 언덕, 샤울레이’였다. 국제우편 봉투에 크고 작은 십자가들로 뒤덮인 언덕 사진 석 장만 덜렁 들어있고, 그중 하나의 뒷면에 다시 휘갈겨 쓴 영어로 그런 사진 설명이 적혀있었다. 그 기괴하면서도 인상적인 언덕의 역사를 그녀에게서 들은 것은 그 사진들을 받은 날로부터 삼 년 뒤가 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사진 봉투를 그때 혜련으로부터 온 마지막 소식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어떤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사진 봉투 말고도 그 뒤에 받은 우편물이나 들은 후문이 더 있을 수도 있다. 갑자기 수렁에 빠져버린 듯한 내 인생이, 결국은 파탄으로 끝나버린 단 한 번의 결혼생활과 만신창이로 쓰러지고도 끝날 것 같지 않게 진행되던 그 기나긴 임종이 내 기억력을 혼란케 한 몇 년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 결혼은 그때의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 선례가 적거나 충분히 설명되지 못해 온당찮게 받아들여지는 데가 있었던 듯했다. 그 첫 번째는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때 마흔이었고 아내는 스물아홉이었으나, 삶의 이력에서는 아내가 나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그러나 그 다채로움이 종내는 상처가 되어 그만큼 그녀의 존재를 나이보다 낡고 헐겁고 사그라지는 듯 보이게 만들었는데, 불행히도 내가 그녀에게 빠진 것은 첫눈에 드러나는 그녀의 그와 같은 인상이었다.

 얼굴 절반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선글라스가 암시하던 대인기피증으로부터 그것을 벗었을 때의 지친 듯한 인상,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초탈한 듯 보여 자칫 방자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방심과 망연함, 그리고 짧은 시간에도 끊임없이 그 변환을 보여주는 조울(躁鬱)의 기미 - 나는 그런 것들에 빠져 마치 기다리던 시내버스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올라타듯 사랑에 빠지고 결혼으로 갔으나, 세상 사람들은 나와 견해가 달랐다.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흥미를 끌 수 있는 병적인 증상일 수는 있어도 사랑에 빠지거나 그 사랑을 제도화하는 결혼으로 이끌 만한 매력은 아니었다.

 당시 통념으로 신붓감을 고르는 데는 그녀가 이미 명성과 갈채를 맛본 적이 있는 연극배우라는 것도 그리 우호적이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결혼은 가사와 양육을 분담할 배우자를 얻는 것이지 함께 일할 동업자나 조력자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녀의 이혼 경력도 내가 그런 만큼 쉽게 무시되지 않았다. 채 이십 년이 안 된 일이지만, 오히려 규모 있는 집안으로 보면 그런 며느리를 들이는 것은 괴변이나 재앙까지는 아니라도 대단한 양보는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비장한 전투라도 벌이는 심경으로 내 사랑과 결혼을 밀어붙였고, 처음 한두 해는 무슨 승리라도 즐기듯 거기에 몰두하고 집착했다.

 하지만 그사이에도 내가 그런 세상의 통념이나 편견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웠던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와 그 땅이 길러낸 아들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이 땅과 이 시대가 품게 된 그런 통념과 편견을 함께 형성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내 의도적인 부정과 무시의 두터운 벽을 뚫고 의식을 건드려온 것은 바로 그런 통념과 편견이 품고 있는 결혼에 대한 기대였다.

 나는 우리가 결혼생활을 해왔다고 말했지만, 당시의 통념 또는 편견으로 보아 그게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많은 밤을 한집에서 보냈지만, 그것이 생활공간인 주거에서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결혼 뒤에 두 사람의 주거로 아파트를 가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주거로 기능하기에는 그 활용이 너무도 제한적이었다.

 우리는 한 번도 그 아파트와 극단사무실과 무대를 구분해 쓴 적이 없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우리가 한 번도 그 아파트를 생활하기 위한 주거공간으로 써본 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물론 거기도 주방과 취사시설은 갖춰져 있고, 우리도 가끔씩은 이런저런 요리를 해 먹었지만, 그것은 바쁘면 극단 사무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무대 뒤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직 우리만이 먹기 위해 장을 보고 정해진 요리법에 따라 요리를 해 먹고 그 뒷설거지를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도구도 설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 아파트에다 여러 가지 입성을 갈무리해 두고, 갈아입고, 세탁하거나 수선했지만, 그 또한 가정생활의 일부는 아니었다. 역시 극단사무실이나 휴대가방에 그날 쓰일 의상을 비치해 두고 갈아입거나 필요하면 세탁하고 수선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기거에서도 그랬다. 우리는 거기 사는 동안 가장 많이 그 아파트에서 자고, 그래서 가장 많이 그 아파트에 머물렀지만, 그 유숙 또는 기거의 내용은 바빠서 극단 옆 모텔에서 한숨 눈을 붙이거나 지방공연 중 단원들과 함께 묵는 이류호텔에서의 하룻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잔다는 것은 그날 밤은 따로 비용을 물지 않는 거기서 쉬어도 되는 날일 뿐이었다.

 요컨대 우리에게는 그 분업과 협업의 비율이 어떻게 되든 우리가 함께 주도해 이끌어가는 생활이 없었다. 가장 또는 남편으로서의 내가 없는 것처럼 주부 혹은 아내로서의 그녀도 없었다. 하지만 처음 한동안은 무언가가 허전하면서도 나는 우리에게 무엇이 없어 그런지 알지 못했다. 함께 살게 된 그녀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절에는 남들의 삶도 당연히 나와 같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다가 살아오는 동안 보아온 여러 부부의 삶이 기억나고, 나 자신에게도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쌓여가면서 나는 차츰 우리 삶의 진상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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