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연평도 불바다에서도 민초들 희망을 꽃 피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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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 3월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 배는 가라앉았지만 그 비극과 충격의 바다에서 한국 사회는 다른 많은 걸 건져 올릴 수 있었다. 후배 수병(水兵)을 구하겠다며 죽음의 바다에 뛰어든 한주호 준위, 해저탐지 함정이 찾아내지 못한 어뢰의 잔해를 그물로 건져낸 쌍끌이 어선 선장, 군 수색작업에 참여했다 돌아오는 길에 선박충돌로 목숨을 잃은 금양호 선원들, 전사 보상금 중 1억여원을 방위성금으로 내놓은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여사, 천안함 유족에게 다가갔던 수많은 도움의 손길들…. 종북(從北)주의자들이 북한 소행을 부인하고 군 지휘부의 무능이 북한의 기습에 병사들을 방치했지만, 민초들은 말없이 국가안보를 도왔다. 민초들의 이런 행동이 희망과 용기의 증거다.

 연평도 불바다 사태에서도 이런 민초들이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처럼 그들은 다시 용기와 배려, 희망을 자루에 담아오고 있다. 이번에 북한 해안포의 공격으로 해병 2명이 사망함으로써 해병은 매우 위험한 임무라는 게 다시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해병 지원율은 예년보다 높다고 한다. 특히 가장 험난한 수색 병과가 경쟁률이 가장 치열하다고 한다. 연평도 전투에서 임준영 상병은 방한모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K-9 자주포로 응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런 감투정신이 후배 젊은이들을 해병으로 끌어들이고 있을 것이다.

 연평도 주민들은 불바다에 놀라 거의 맨몸으로 뭍으로 피신했다. 그런 피란민들을 인천의 대형 찜질방 주인이 무료로 먹이고 재워주고 있다. 비좁지만 얼마나 따뜻한 피란처인가. 피란민들은 여기서 놀란 몸과 마음을 달래고 재기의 용기를 다듬고 있다. 외과의사 이상달씨는 20년 전 공중보건의로 연평도에 근무했었다. 그는 그때 정이 들었던 주민들이 지금 충격의 피란살이를 하는 게 안타까워 5000만원을 내놓았다. 많은 자원봉사자가 연평도로 달려가 임시 거처를 지어주거나 버려진 개와 고양이를 돌보고 있다.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얘기하지 않았는데 민초들은 앞다투어 적과 싸우고 고난에 처한 동포를 돕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국가의 국민은 단결만 하면 결국 독재국가의 기습을 이겨낼 수 있다.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패망한 것은 정신이 약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히틀러를 이겨낸 것은 처칠이란 지도자가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남한에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자기 손으로 달성한 국민이 있다. 집권세력과 군이 다소 무능하고 야당과 친북단체가 국론을 갈라놓아도 국민이 정신을 잃지 않으면 구멍을 메울 것이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천안함과 연평도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지도자들이 조금만 더 헌신적이고 군이 각오를 새로이 한다면 국민의 안보 에너지는 커다란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이 한주호 준위와 임준영 상병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요, 연평도 너머 북으로 날아가는 남한 민초의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