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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품SW 사용 늘리려면 친고죄 유지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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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한국·미국·일본 저작권 전문가들이 최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미 FTA와 효과적인 소프트웨어 저작권 보호방안’에 관한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대희 고려대 법학과 교수, 로버트 홀리먼 미국사무용소프트웨어연합 회장, 나카가와 후미노리 일본컴퓨터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 법무담당 매니저. [한국경영법률학회 제공]


최근 우리나라와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다시 논의하는 가운데 국내 소프트웨어(SW) 업계도 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한·미FTA 협상때문에 국내 SW산업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걱정에서다. 특히 친고죄 폐지 여부에 고민이 많다. 친고죄는 피해 당사자의 직접 고소가 필요한 범죄다. 현행 국내 불법 복제 SW 관련법에선 친고죄가 적용된다. 불법 복제 SW를 쓰는 기업이나 개인을 SW 개발사 등 저작권을 가진 업체가 고소해야 기소와 처벌이 가능하다.

SW업계가 걱정하는 것은 한·미 FTA 협상을 통해 현행 친고죄 관련 법체계가 비친고죄로 바뀔 가능성이 있어서다. 비친고죄가 되면 검찰이나 경찰이 직권으로 불법 복제 SW 사용자를 기소할 수 있다. 겉으로는 법이 강화되니 불법 복제가 줄어 SW업계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법 복제가 은밀하게 더 성행하고 판로가 막힐 수 있다는 SW업계의 우려이다. 검찰이나 경찰이 직접 고소 고발을 하면 SW업체의 이해에 반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고 적발 횟수나 처벌 강도도 약해질 거라는 점 때문이다. 지난해 컴퓨터프로그램 보호법이 폐지되면서 SW가 영화·음악 등과 동일한 저작권법을 따르면서 한·미FTA 때문에 친고죄가 비친고죄로 바뀔 것이라는 걱정이 깊어졌다. 한·미 FTA는 저작물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강화할 전망이고, 그 과정에서 SW에 대한 특수성이 고려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이와 관련해 지난 19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는 ‘한·미 FTA와 효과적인 소프트웨어 저작권 보호방안’을 주제로 한·미·일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한국경영법률학회가 주최하고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서 한·미·일 저작권 전문가들은 현행 친고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마이크로소프트·애플·지멘스·어도비·시만텍 등 세계적 SW업체들의 모임인 사무용소프트웨어연합(BSA)의 로버트 홀리먼 회장도 한국 내 SW 불법 복제를 막으려면 친고죄 유지가 효과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SW 특수성 고려해야=친고죄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의 불법 복제 SW 사용 관행에서 비롯된다. 국내 SW시장 초창기엔 불법 복제 SW 이용이 일반적이었다. 정품 사용자는 바보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다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소비자의 인식 전환으로 올해 국내 SW 불법 복제율이 41%로 사상 처음 세계 평균(43%)보다 낮아지는 등 시장이 정상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친고죄는 기업의 정품 SW 사용을 이끌어 내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비친고죄 법체계에선 불법SW 사용 기업을 무조건 범죄인으로 몰지만, 친고죄는 SW업계가 이들 기업을 법정이 아닌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정품SW를 쓰도록 만들 수 있어서다. 기소 위기에 몰린 기업들이 불법 복제SW 사용 업체라는 불명예 대신 정품 사용 업체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SW업계는 매출 확대와 판로 개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얻는다.

하지만 비친고죄 법체계에선 형사당국이 자체적으로 기소·처벌할 수 있어 SW업체는 소송 과정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SW업체는 상대 기업을 범법자로 만드는 일밖에 없는 데다 범법자가 된 기업은 문제의 SW를 정식으로 구입할 리도 없다.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 김은현 부회장은 “잠재 고객인 기업을 처벌하기보다 합법적인 협상 테이블로의 유도가 SW 업계와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일본도 친고죄 유지=고려대 법학과 이대희 교수는 ‘프로그램 저작권 침해와 친고죄’ 연구 결과를 통해 “미국은 민사소송이 발달했고, 형사소송도 당사자 합의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아 친고죄와 비친고죄의 효과에 별 의미가 없다”고 소개했다. 반면 형사소송이 주된 제재 수단인 한국에서는 친고죄 여부가 SW업계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도 친고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1996년 80% 수준이던 SW불법 복제율을 지난해 21%까지 낮췄다. 일본컴퓨터SW저작권협회의 나카가와 후미노리 법무 담당 매니저는 “2007년 비친고죄로 바꾸는 것을 검토했으나 결국 비친고죄 적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을 냈다”고 말했다. 한국지식재산서비스협회 백만기 회장은 “한·미FTA는 국내 SW업계에도 도전과 과제를 던져줄 중요한 정책”이라며 “정부와 SW업계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올바른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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