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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고 푸른 섬, 시간이 멈춘 극청정 지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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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08면

1 지중해 위 이비사 섬에 16세기에 건설된 성벽과 건축물을 바다 위에서 바라본 모습. 2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도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해 놓은 튼튼한 성벽. 3 산타 프란체스 부속박물관 앞에 조성해 놓은 성인의 묘지와 조형물.4 이비사 섬의 대표적인 토산품인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 5 포르멘테라 항구 인근에 남아 있는 선사시대 무덤 유적 카나 코스타. 6 이비사 성벽의 난간에서 지중해를 감상하는 방문객들.

지중해 유일 복합유산
처음 이비사 섬을 찾은 것은 2003년 봄이었다. 그 뒤로 7년 만인 이번 가을 이곳을 다시 찾았다. 지중해를 순회하는 크루즈 유람선의 갑판 위에서 접했던 만큼의 감흥과 설렘은 없었지만, 망망대해에 떠 있는 여러 섬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항공여행도 나름대로 호기심과 기대감을 부추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10월 초인데 기온은 30도를 오르내렸다. 공항에서 미리 예약해 놓은 렌터카를 받아 곧장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처음 방문 때의 기억을 더듬어 시내를 빠져나가자, 상큼한 공기가 가슴 속까지 밀려들었다. 수확을 막 끝낸 포도밭, 아직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는 올리브와 무화과나무, 용도가 분명치 않아 보이는 정겨운 가옥. 시선에 잡히는 넉넉하고 여유롭게 풍광은 아련한 추억 속을 달리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진작가 이형준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복합유산을 찾아서 <9> 스페인 이비사섬

7 가파른 해안절벽 위에 세워진 성벽과 소나무.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된 이비사 섬의 상징이다.

그림처럼 정겨운 풍광과 마주하며 달리기를 2시간. 하얀 바탕에 검정색으로 적어 놓은 산타 미켈(St Miquel)이란 사인보드가 시선에 잡혔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우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수확철인 탓에 나이 많은 어른 몇 분을 만난 것이 전부였지만 어떤 곳보다 푸근하고 아늑했다. 과실수로 둘러싸인 들판과 소나무 숲을 응시하듯 늘어선 성당과 수십 호에 달하는 소박한 가옥은 한 폭의 풍경화 그 자체였다.

8 칸 마르카 동굴 내부에 흐르는 폭포를 연상시키는 물줄기. 어떤 종유동굴보다 수량이 풍부하다.

태초의 모습 간직한 바다와 신비로운 동굴
산타 미켈을 뒤로하고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10분쯤 달리자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을이란 계절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피서객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백사장과 아름다운 해안 풍광이 어우러진 현장. 산타 미켈 항구(Port de St Miquel)는 항구보다 휴양지에 가까웠다. 산타 미켈 항구는 이비사 섬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가운데 한 곳이다. 가파른 낭떠러지에 조성해 놓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은 이비사 섬이 얼마나 청정한 곳인지 새삼 각인시켜주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소나무로 덮인 울창한 숲은 탄성으로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하게 할 정도다.

산타 미켈 항구의 최고 자랑거리는 칸 마르카 동굴(Cova de Can Marca)이다. 전문 안내원과 동행할 때만 출입이 가능한 이 동굴은 약 10만 년 전에 생성됐다고 한다. 바다에 가까운 출입구를 통과하자 별천지가 있었다. 칸 마르카 동굴은 만장굴이나 벵뒤굴, 환선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여느 종유석 동굴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풍부한 수량이다. 덕분에 동굴 안에는 작은 폭포와 계단식 논을 연상시키는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약 10여m 높이에 달하는 폭포와 신비로운 색상을 연출하는 자그마한 연못들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9 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는 야생화 봉오리.

길이 100km의 절벽은 생태계 보고
이비사의 때 묻지 않은 바다는 해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이비사와 주변 해안에는 광범위한 해저 초원이 조성돼 있다. 포시도니아로 불리는 해저 초원에는 200여 종이 넘는 어류와 34종의 극피동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 해저 초원이 주목 받는 까닭은 다수의 어류와 극피동물이 이곳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면적 두 배에 달하는 이비사 해안은 54개의 비치와 가파른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다. 바다에서 곧장 하늘로 솟은 바위절벽은 높이가 수십m에서 300m에 이른다. 낭떠러지를 연상시키는 절벽의 길이를 합산하면 100여㎞에 달한다. 인간의 접근을 용납하지 않는 절벽은 멸종 위기에 처한 발레아레스 섬새, 오두인갈매기, 유럽쇠가마우지, 엘레오노라송골매, 물수리, 바위제비, 칼새 등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바위절벽 주변에서는 많은 나무와 꽃을 만날 수 있다. 섬에는 수령이 수백 년에 달하는 거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소나무와 선인장, 키 작은 나무가 가득하다. 바위와 자갈 틈에서 자라는 꽃들과 나무들은 거친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키가 작다. 섬에는 고유종인 작약과의 파에오니아 캄베세데시를 비롯하여 디기탈리스, 발레아레스 족제비꽃, 난초과 식물 등 30종이 넘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다양한 문명을 품은 요새 도시 이비사
기원전 654년 페니키아의 교역도시로 발전을 시작한 이비사는 카르타고·로마·아라비아·아라곤·터키의 지배를 걸쳐 현재 에스파냐(스페인)에 속해 있다. 주인이 자주 바뀌었던 만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평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여러 문화가 뿌리 내리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비사를 상징하는 유적지는 가파른 언덕 위에서 지중해를 응시하고 있는 옛 시가지다. 현재 서남쪽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옛 시가지는 요새 도시를 방불케 한다. 가파른 해안절벽 위에 다시 10~30m로 축성해 놓은 성벽은 어떤 공격에도 도시와 시민들을 지켜낼 것처럼 보였다. 16세기 때 건설된 성벽 안에는 종교건축물을 중심으로 개성이 돋보이는 주택, 상점, 군사시설, 각종 물품을 보관했던 창고유적지 등이 남아 있다.

옛 시가지에 보존돼 있는 문화재는 모두 소중하고 독특하다. 고유 기능을 지닌 만큼 가치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대표 유적을 꼽으라면 종교 건축물을 빼놓을 수 없다. 고딕·로마네스크·르네상스 건축물 양식으로 이뤄진 종교건축물 중 최고는 성직자와 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산타 프란체스(St Francesc) 성당과 부속박물관이다.

4000년 전 선사유적지와 중세의 마을들
이비사 섬 남쪽에는 태초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된 포르멘테라(Formentera) 섬이 있다. 푸르고 푸른 섬에는 활기 넘치는 거리도, 웅장한 성벽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기원전 1800년께 조성된 선사유적지와 중세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담한 마을들, 그리고 잘 보존된 해안 절벽과 특산물인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 등이 있다.항구 인근 한적한 들판에는 카나 코스타(Cana Costa)라고 불리는 거석유적지가 있다. 선사 시대 무덤으로 알려진 유적지는 페니키아인들이 교역항구로 이용하기 훨씬 이전 이곳에 문명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카나 코스타 유적지는 그 모양새가 지중해 대표 거석문화 유적지인 몰타에 남아 있는 것과 흡사하다. 또한 내륙에는 전통을 이어온 마을이 흩어져 있다. 최근 관광산업에 눈을 돌리는 마을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전통마을이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도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작은 마을이 더 많다.

포르멘테라 해안 지역에는 적으로부터 섬과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한 망루와 태초의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섬에 세워놓은 망루와 해안절벽은 이비사 망루와 절벽보다 크고 웅장하다. 지중해를 응시하고 있는 유적지와 해안절벽에서는 어렵지 않게 희귀 조류와 꽃을 접할 수 있는데 유별나게 소나무가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비사 섬은 나이트라이프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찾는 곳은 나이트클럽과 대형 테크노바로 한정돼 있다. 이비사 섬은 예로부터 인간과 동식물에게 깨끗하고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던 곳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지역은 넘쳐나는 방문객으로 예전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유 문화와 생태계를 접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다.
* 다음 호에서는 중국 태산을 찾아갑니다.


이형준씨는 사진작가이자 여행작가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한 뒤 130여 개 나라, 1500여 곳의 도시와 유적지를 다니며 문화와 자연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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