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진술거부권, 들쭉날쭉 잣대 고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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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올 들어 주요 재판마다 문제가 되고 있는 피고인의 ‘검찰 신문 거부’ 허용 범위를 놓고 법원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 검찰 신문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포괄적 진술거부권’을 피고인에게 허용할지 등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부장들은 조만간 비공개 전원 회의를 열 예정이다.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부장 홍승면)가 민주노동당에 불법으로 당비를 납부한 혐의(정당법 위반 등)로 기소된 정진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등에 대한 재판에서 이런 방침을 밝혔다. 이날 재판에서 정 위원장 측은 “개정 형사소송법이 포괄적 진술거부권을 인정하는 취지의 조항을 추가했으므로 검찰이 신문 자체를 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부는 “이와 관련해 논란이 있으니 형사합의부 부장들끼리 상의해 재판의 진행 방향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마다 허용 범위 달라=그동안 포괄적 진술거부권의 허용 범위에 대해 재판부마다 다른 입장을 보여 왔다. 처음 논란이 불거진 것은 지난 4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뇌물 수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재판 때다. 형사27부(부장 김형두)가 실무지침서를 근거로 ‘검찰 신문 절차 생략’ 결정을 내렸지만 검찰이 “신문권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재판에 참여하지 못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격론 끝에 ‘대답을 강요·유도하거나 모욕적이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만 검찰 신문이 허용됐다.

 지난 7월 ‘용산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남경남(56) 전국철거민연합 의장도 재판에서 “검찰의 신문 자체를 거부하겠다”고 주장했다. 형사21부(부장 김용대)는 “검사가 스스로 신문권을 포기할 수 있어도 법원이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남 의장이 “내게도 검사의 신문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재판부는 휴정 끝에 “양자의 권리가 충돌할 때는 적절한 선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며 “재판의 목적인 ‘실체적 진실 반영’을 위해 검사의 신문을 허용한다”고 결정했다.

 포괄적 진술거부권을 보다 엄격하게 제한한 경우도 있다. 형사31단독 권순건 판사는 지난 7월 한명숙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9억원 수수’ 의혹 수사와 관련해 공판 전 증인 신문을 받게 된 한 전 총리의 여동생에게 “검찰의 개별 질문마다 진술거부권 행사 여부를 답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검찰 신문 중 재판부가 ‘꼭 답변해야 한다’고 판단한 질문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5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덧붙였다. 한 전 총리의 여동생은 검찰이 질문할 때마다 일일이 “거부하겠다”고 답해야 했다.

 지난달 28일 형사항소9부(부장 이상훈)의 심리로 열린 PD수첩 ‘광우병’ 편의 제작진에 대한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는 검찰과 피고인이 모두 재판부의 결정에 반발했다. 재판부가 한 전 총리 때처럼 “검찰 질문을 재판부가 사전 검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검찰이 거부했다. 제작진 측은 “재판부가 신문을 강행하겠다면, 검찰이 질문을 하는 동안 퇴정(退廷)하겠다”고 반발했다. 재판부는 “소송지휘권을 거부한다면 강제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결국 검찰이 일방적으로 질문을 읽고 제작진은 증인석이 아닌 피고인석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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