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어떤 이유로도 예산 심의를 막아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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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국회가 우려했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민주당은 어제 의원총회에서 ‘청목회’ 수사를 이유로 예산 심의를 거부하기로 했다. 국회에 쌓여 있는 각종 법안이나 의안들이 모두 발목이 잡혀버렸다. 누차 지적한 대로 예산 심의는 어떤 이유로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내년도 나라 살림을 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국회의원들이 동료를 법 집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국민의 살림살이를 방패막이로 삼는 행동은 용납되기 어렵다.

 물론 민주당은 관련 피의자들을 검찰에 출두시켜 조사를 받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논란 속에서도 법 절차에 따르기로 한 것은 올바르고 용기 있는 결정이다. 법치국가에서 어느 누구도 법망을 벗어난 성역으로 존재해선 안 된다. 사실 이번에 수사 대상이 된 내용은 과거의 관행(慣行)에 비추어 보면 억울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정치자금법에 불법으로 금지해놓은 것이다. 민주당이 이 문제를 정치쟁점으로 몰아갈수록 스스로 불법임을 인정하고, 법적으로 대응해서는 불리하다고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기왕에 검찰 수사에 협조를 한다면 구차하게 예산 심의를 볼모로 삼을 게 아니라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당당하게 대응해주기 바란다.

 10만원 이하의 소액 후원자들까지 어떤 단체에 가입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정도라면 결국 무죄로 결론이 날 것이니 걱정할 이유가 없다. 정치권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10만원 이하의 후원금을 무조건 합법화해 주면 그 폐해(弊害)를 감당하기 어렵다. 대기업이나 각종 이익단체가 종업원, 또는 회원들의 이름으로 분산해 거액을 후원하는 경우를 상상해보라. 자칫 국회가 법을 사고파는 난장판이 되지 않겠는가.

 정치권에서는 검찰이 과잉수사를 한다고 하지만 국민 여론은 그렇지 않다. 그야말로 소액을, 살림살이가 궁핍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법을 지키지 못해도 일반 국민은 고개를 숙이고, 처벌을 달게 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정치권의 항의가 국민의 눈에는 특권층의 오만으로 비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이 정치권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보는 데 대해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청목회 수사를 둘러싸고 국민 여론이 검찰의 손을 들어주는 데는 이런 인식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TV 드라마의 영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 스스로 특권을 벗고, 좀 더 깨끗한 집단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각고(刻苦)의 노력을 해야 한다.

 과거에 비해 정치권이 부정한 돈의 굴레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럴수록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 엄정한 잣대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부 탈선 정치인에 대해 동지애보다 국민의 눈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부패 집단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굳이 법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면 국민을 설득해 법을 먼저 고치는 게 옳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