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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서울에 여관이 많이 있는 이유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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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70년대의 서울 낙원동 여관 골목.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종로와 북촌 일대의 수많은 민가가 여관으로 등록했다. 그 후 많은 집이 폐업하거나 하숙집으로 전업했지만, 남은 집들은 ‘청춘 남녀’나 ‘불륜 남녀’를 대상으로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다. [사진출처 :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구미호 이야기든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든, 전통시대 ‘어드벤처’ 설화의 주인공은 대개 ‘나그네’다. 지금은 여유·휴식 등의 단어가 여행과 어울리지만, 한 세기 전만 해도 여행은 모험이었다. 동네 밖에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길 위에는 강도나 맹수, 독사가 있었고 기상은 예측할 수 없었으며, 병에라도 걸리면 손쓸 도리가 없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 상례라지만, 당시의 고생은 지금 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러니 역마살이 끼었거나 팔자가 기구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굳이 집 밖으로 나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여행하는 사람을 위한 숙박시설은 있었다.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와 그 일행은 이태원·홍제원 등 ‘원’이라는 관용 숙소에서 묵었다. 과거시험 길에 오른 선비는 시골 양반 집 신세를 졌으며, 장사꾼들은 지역마다 정해 둔 객줏집에 짐을 풀었다. 그밖에 떠돌아다니는 ‘뜨내기’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취급됐기에 잠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저 장터 옆 주막에서 술추렴하며 하룻밤 지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개항 이후 인천과 서울 등지에 서양식 호텔과 일본식 여관이 하나 둘 생겼지만, 한국인 장사꾼과 여행객들은 여전히 객줏집을 이용했다. 일제는 1913년 숨어 다니는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객주취체규칙’을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객주들은 자기 집에 숙박한 손님의 인적 사항, 자기 집에 오기 전에 묵은 곳, 행선지 등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가 떠나면 한 시간 안에 경찰 주재소에 신고하게 되어 있었다. 이 ‘숙박계’는 일부 변형된 채 아직껏 남아 있거니와, 객줏집에 숙박하는 손님이 많을 경우에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규정이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1일간, 일제는 ‘자신들의 치적’을 홍보하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확인시키기 위해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대규모 박람회를 열고 전국에서 160만여 명을 강제 동원해 관람시켰다. 그런데 당장 숙박시설이 문제였다. ‘서울 구경’ 온 시골 사람이 사흘씩만 묵는다고 가정해도 매일 10만 명 정도에게 잘 곳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 무렵 서울 인구는 20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 6만 명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방에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은 모조리 여관으로 등록하다시피 했고, 서울은 ‘여관의 도시’가 됐다. 행사가 끝난 뒤 수많은 여관이 곧 폐업했지만, 남은 일부는 다른 ‘영업’으로 활로를 찾았다. 그 이후 지금껏,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세계적으로도 여관 많은 도시라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