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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또 보게 만드는 마케팅...거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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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02면

최근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국내 소개가 풍성하다. 지난여름 ‘명탐정 코난: 천공의 난파선’과 지브리의 ‘마루밑 아리에티’가, 10월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스카이 크롤러’가 각각 개봉했다. 이어 10월 과천 국제SF영상축제 개막작이었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이 개봉(11일)됐고, 제7회 메가박스 일본영화제(17~21일·메가박스 신촌)가 다양한 화제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일본 영화계 최고 흥행기록은 애니메이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2400만 명)일 정도로 ‘애니 강국’ 일본이지만 요즘은 힘이 많이 빠진 것도 사실. 소자녀화로 아이들이 1000만 명 정도 줄었고, 데이터 녹화와 무료·불법 동영상의 범람으로 2005년 이후로는 영상물 시장이 감소하고 있는 데다, 게임·레저 등 다양한 여가문화 보급으로 시장 지배력도 약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매년 수십 편의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걸리고 여전히 화제를 몰아가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불황 모르는 일본 극장판 애니매이션, 수익 전략의 비밀

거침없이 돈 쓰는 매니어 소비시장이 9조원
일본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애니메이션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전 연령층에 고루 인기를 얻고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과 ‘도라에몽’ ‘짱구는 못말려’ ‘포케몬’ ‘원피스’ ‘나루토’ 등 인기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극장용으로 만든 작품들이다. 어린이 관객과 그 부모의 동반 관람, 각종 캐릭터 상품 판매수익을 노린다. 둘째는 감독의 명성이나 작품성을 앞세워 적은 수의 중소형 상영관에서 장기 상영하고, 추후 DVD나 블루레이 등의 영상물 판매를 통해 수익을 내는 작품들이다. 국내에도 많은 팬이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별의 목소리’ ‘초속 5㎝’나 이번 메가박스 일본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요시우라 야스히로 감독의 ‘이브의 시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작품들은 저비용의 제작비와 상영비용으로 투자 리스크를 줄이고 최소한의 관객만으로 일정 부분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이점도 있지만, 5만원이 넘어가는 DVD나 블루레이를 구매해주는 탄탄한 소비시장 구조에 의해 유지되는 측면이 크다.

셋째가 ‘매니어’ 시장 타깃이다. ‘오타쿠’라 불리는 일본 매니어들은 만화, 애니를 비롯한 게임, 철도, 아이돌, 코스프레 등 다양한 분야의 핵심 소비층이다. 이들의 소비시장 규모는 약 9조원에 이른다(출처: 야노경제연구소/2009년 기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 상품, 서비스에 대해 수십만~수백만원씩을 지출한다. 20세기 말 하나의 사회적 신드롬이 됐던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시리즈를 비롯, 동인게임그룹의 대표적 성공 브랜드라 할 수 있는 ‘TYPEMOON’의 ‘Fate/stay night’, 한 게임의 서브 캐릭터로 출현했다가 인기를 끌어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세 번의 TV시리즈로 제작된 후 다시 극장용까지 제작된 ‘마법소녀 리리칼 나노하’ 등이 매니어용 작품군에 속한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충성도 높은 매니어층의 반복 관람에 의한 흥행성 증대, 엄청난 규모의 부가상품 시장이다.

사인지로, 필름 컷으로 충성도 높은 독자 유인
38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을 기록 중이었던 지난 8월 일본 도쿄 오다이바에 위치한 대형 전시장 빅사이트. 개장 시간 전인 이른 새벽부터 수만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코믹마켓’ 일명 ‘코미케’라 불리는 일본 최대의 매니어 행사에 동인지를 비롯한 각종 관련 상품을 구매하러 온 인파다. 여름과 겨울 2회 실시되는 이 행사의 여름 3일간 방문 인원은 약 60만 명. 일본 민간 주최의 옥내 행사로는 도쿄 모터쇼에 이어 두 번째 규모다. 900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아마추어 작가의 패러디물이 주류인 ‘동인지(同人誌)’의 최대 이벤트다. 개인 아마추어 작가나 클럽이 주된 판매자이지만 관련 기업 참가 섹션도 있는데 이 섹션에 들어가고자 하는 수만 명의 대기자들은 세 가지 줄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마법소녀 리리칼 나노하’, ‘TYPEMOON’, 그리고 그 외 줄이다. 제일 줄이 긴 ‘나노하’와 ‘TYPEMOON’의 두 줄에서만 일어나는 3일간의 현장 매출만도 수십억원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일본 애니메이션,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되는 작품이 한국 개봉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 같은 일본 특유의 매니어용 소비구조를 함께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두 번째 극장판이 국내 공개될 당시 선착순으로 포스터를 주는 이벤트를 한 적이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하지만 관련 이벤트는 그걸로 끝. 얼마 되지 않아 그 작품은 간판을 내렸다.

반면 일본에서 개봉한 ‘마법소녀 리리칼 나노하’는 어땠나. 두 번 본 사람에게는 사인지를, 세 번 본 사람에게는 필름 컷을 주는 이벤트를 동시에 전개했다. 그 결과 개봉일 다섯 번을 연속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수십 장의 필름을 가진 매니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인의 소비자를 10명의 소비자로 늘리는 효과를 거두며 흥행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게다가 주요 장면이 담긴 필름 컷은 일본 온라인 옥션에서 53만2000엔(약 750만원-5컷짜리 필름을 주므로 컷당 가격이 150만원)에 낙찰되는 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나노하’는 기존 마법소녀 캐릭터에 화려한 액션대전, 메카닉을 가미해 청소년과 성인 남성 소비자 시장까지 공략, 열혈 매니어층에 기반한 소비시장을 창출한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UCC 통해 따라 하기 유행 … 작품 속 배경은 관광 명소로
새로운 스타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스즈미야 하루히’와 ‘케이온’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지방의 중소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교토 애니메이션’이 만들었다. 이 회사의 경우 무작정 하청이 아니라 품질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신뢰를 쌓았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경우 학원 러브스토리라는 일상적인 컨셉트에 초능력자, 외계인, 시간여행자 등의 비일상적 SF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다. 원작이 2003년 일본 최고 대중소설에 주어지는 스니커 대상을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특히 TV시리즈는 UCC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엔딩신에 등장하는 춤 동작을 따라 하는 붐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덕분에 올해 2월 단지 24개의 극장에서 개봉했지만 주말 박스오피스 6위의 성적을 거뒀고, 3월에는 60개, 6월에는 전국 103개 관으로 늘어났다. 결국 세계적인 흥행작 ‘아바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극장 매출만 15억 엔(약 200억원) 이상의 흥행수입을 거뒀다.

‘하루히’의 성공으로 입지를 구축한 교토 애니메이션이 차기작 TV 시리즈로 ‘러키 스타’와 ‘케이온’을 선택하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원작 만화가 그리 인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 모두 원작을 능가하는 연출과 완성도를 선보이며 크게 히트했다. 여고 연주클럽의 일상물을 다룬 4컷 만화가 원작인 ‘케이온’은 블루레이와 DVD가 50만 장 넘게 팔리고 오프닝과 엔딩송은 일본 오리콘 데일리차트에 동시 1, 2위를 기록했다. 시즌 1과 관련 있는 음악CD는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음악을 테마로 한 이 애니메이션(실제로 음악을 하는 장면은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의 인기가 J-POP에 대한 인기로 이어지면서 여성밴드에 대한 인식 변화, 작품 속 기타 모델의 매출 증대 등 다양한 경제 활성화 효과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슬램덩크’가 농구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농구화 매출 증대로 이어진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특히 실제 있는 지역이나 건물을 작품 속 배경으로 한 덕분에 이런 곳들은 매니어 사이에서는 ‘성지’가 되며 관광명소가 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정도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금 수많은 미디어와 시장의 변혁기에서 이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곳을 향해 전진해 나가고 있다.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 인식의 변화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세계와 접촉하려는 시도들이다. 항공기 동체에서, 시장에서 파는 단무지에서, 또 식당과 카페, 지나가는 차량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 소비층의 연령이 높아지고 구매력도 증가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스스로 자신의 시장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김세준씨는 어릴적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심취한 덕분에 한글과 일본어를 쉽게 깨쳤다. 결국 밥벌이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하게 된 열혈 매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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